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 바람둥이의 말이 아니라 최근에 우리 사회에 뜨겁게 이슈가 되고 있는 폴리아모리(Polyamory)이다.

시대는 변화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인구가 감소되고 결혼에 대한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여성들이 더 많아지는 성비불균형이 이러한 사조(思潮)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고 여성의 평등과 지위 향상에 대해 편협적인 생각은 갖고 있음은 전혀 아니다.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이 쓴 구운몽(九雲夢)에서도 주인공 양소유가 8명의 여성과 애정을 공유한 일부다처제 현대판 폴리아모리의 원조이지만 헛된 욕망이 부질없음을 전해 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사회는 결혼을 해서 받드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관념에서 인생을 즐기자는 쾌락주의 경향이 다자연애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고등교육과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져 양육과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이 아닐까?

전통적 결혼관은 행복추구라기보다 조상 봉사(奉祀)와 종족 번식의 인식으로 강압적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성문화의 자유로운 개방 풍조는 새로운 설렘의 짝을 찾는 불건전한 유인체로 인한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다소 위험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배우자 이외의 다른 이와의 관계는 육체적인 정조와 관계없이 금기시 되었지만 간음이 이혼사유가 되지 않는 법제도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한 셈이다. 마치 과거 일부일처제에서 일처다부제와 같이 평등적 요소를 반영한 듯하다.

특히 폴리아모리는 기혼자와 비혼자 관계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혼자에게 양쪽부모의 동의하에 다자연애를 해서 만일 2세가 탄생한다면 가족 구성원의 해체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문제를 발생될 수 있다. 부부가 상대방에게 권태기와 같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위로를 받기 위해 다른 이성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아닌 즉흥적인 동물 감정일 수밖에 없다. 비록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 참고 이해하면서 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쉽게 망각해버리는 상황이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 등 매스미디어가 다자연애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영상물이 자칫 현 시대의 반영이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다자연애의 또 다른 위험성은 성소수자나 동성연애 등으로 비화될 경우 더욱 혼란을 야기(惹起)할 수 있는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 정서적인 연대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의 방식을 선택하는 소통의 노력과 자기 헌신은 말이 쉽지 가정을 가진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폴리아모리가 사소한 일상의 멘토나 토론에 걸친 폭넓은 소통의 정신적 치유라지만, 사회규범이나 제도에서 불륜으로 규정된다면 새로운 사랑의 꽃이 될지, 짓이겨진 꽃이 될지 그 놀라움은 충격적으로 다가옴이 사실이다. 현재 폴리아모리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여져 격변하는 성문화가 잘못 받아들여지면 가치관의 혼란과 윤리 상실이 또다른 사회 병리의 요인(要因)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認知)해야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