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남이면 팔봉리 대지주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 도쿄 우에노미술학교 입학해 조각 공부
카프활동 심취…조선공산당탄압사건 등 옥고
백화·소년·법주사 미륵대불 등 작품 남겨져

① 1922년 동경미술학교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② 1922년 도쿄에서 동생 김기진 및 연극인 박승희, 박승목 등과 함께 연극단체 토월회를 창립하다. ③ 1939년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복원작업에 착수.
① 1922년 동경미술학교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② 1922년 도쿄에서 동생 김기진 및 연극인 박승희, 박승목 등과 함께 연극단체 토월회를 창립하다. ③ 1939년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복원작업에 착수.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충청매일은 지역미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근현대조각가 ‘김복진미술상’ 제정을 기념해 김복진의 삶과 작품세계를 3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김복진미술상은 옛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출신으로 한국 조소 미술의 첫 길을 낸 불상 조각의 대가 김복진(1901~1940)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청주시와 청주시립미술관(관장 이상봉)은 김복진미술상 운영 조례를 제정해 올해부터 김복진미술상을 운영하기로 했다. 청주시립미술관은 △이완복 청주시의회 의원(위원장) △허복순 청주시 문화체육관광국장 △이상봉 청주시립미술관장 △김준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변광섭 청주문화재단 대표 △박문현 충북미술협회장 △손희숙 청주미술협회장 △정의 청주민미협회장 등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운영위는 2월 말 예정된 2차 회의를 통해 수상 분야, 심사위원 구성 등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한 후 3월 중에 작가 추천과 선정을 마칠 계획이다. 이어 올해 12월 시상식을 갖고 수상자에게는 2천만원의 창작지원금이 수여되며, 제1회 수상자 작품 전시가 있을 예정이다. 

 

김복진(金復鎭·사진)은 청주시 남이면 팔봉리에서 1901년 11월 3일에 태어나, 조각, 미술평론,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암울했던 시대에 한국 근대 미술의 토대를 이룬 예술가이다.

호는 정관(井觀)이며, 아버지는 김홍규, 어머니는 김현수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소설가 김기진의 형이며, 아내는 허하백이다.

김복진은 옛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대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6년 황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경성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수학했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미술원 전시 출품작 ‘노자’를 관람하고 조소를 전공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조선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가한 뒤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0년에 우에노미술학교에 입학, 조각을 공부했다. 1922년 도쿄에서 동생 김기진 및 연극인 박승희, 박승목 등과 함께 연극단체 토월회를 창립한다. 이어 동생 김기진 및 동료 문인 박영희, 안석영 등과 함께 문예집단 파스큐라(PASKULA)를 조직하고 『상공세계』 창간호에 첫 비평문 ‘상공업과 예술의 융화점’, ‘광고회화와 예술운동’을 발표했다. 잡지 『개벽』에 자소상 ‘삼년전’이 실렸다. 1924년에는 제5회 ‘제국미술전람회’에 ‘여인입상’을 출품, 입선했다. 도쿄에서의 과로와 영양부족 등으로 인해 각기병에 걸려 청주로 귀향, 6개월간 요양했다.

이후 김복진은 병이 완치되자 1925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가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강단에 섰다. 이 무렵 작품 활동 역시 왕성하게 시작해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삼년전’과 ‘나체습작’을 출품, 3등상 및 입선 했다. ‘나체습작’ 설치 도중 조각의 팔이 부러져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 미술연구소를 개설해 청년들에게 조각을 지도하기도 했다.

1925년 8월 24일 기존의 문학동인 단체인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를 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일명 카프)을 조직하고, 김기진, 박영희, 이량, 김경태, 최승일, 안석주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카프는 기존의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문예운동을 지양하고, 계급의식에 입각한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문예 단체이다. 1926년 1월 기관지 『예술운동』을 발행했는데, 김복진은 표지를 장정하고 ‘주제강조의 현대미술’이란 글을 발표했다. 『문예운동』과 사회주의 계통의 선전 기관지인 『대중운동』의 발행과 집필에 관여했다.

1926년에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여인 입상’을 출품, 입선했으며 잡지 『개벽』 에 비평문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 ‘제5회 조선미전인상기’를 발표했다. KAPF 준기관지 『문예운동』 창간호에 표지 장정을 담당했으며 마르크스-레닌당(조선공산당) 조직에 비밀당원으로 참가했다.

1927년에는 잡지 『조선지광』에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의 강령적 내용을 담은 ‘나형선언초안’을 발표했으며 카프 산하의 학생극 단체인 ‘신건설’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2월 16일부터 경성방송국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와 직업’이라는 시간을 마련해 새 동요 보급 운동을 시작했으며 방정환 등과 함께 우리말 동화와 동요를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6월에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경기도위원회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8월 31일 카프의 외곽 조직인 창광회에 관여해 미술계에 영향력을 넓혀나갔으며. 김은호, 김창섭, 임학선, 신용우 등과 함께 간사로 활동했다.

1928년 2월 이성태(李星泰)의 권유로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다. 같은 해 3월 4차 조선공산당 경기도당의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책임 및 경기도책임자로 활동했다. 그즈음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책임자로서 ‘경성학생야체이카’를 조직해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그 내부에 학생위원회를 신설, 서울 시내 각 사립 중등학교 및 공립 제1고등보통학교 내에 야체이카를 조직해 학생문제, 청년문제, 일본의 중국 출병 반대 등에 관해 토의하고, 일제 교육제도에 반대하며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추진했다.

이같은 활동을 하던 중 이른바 ‘제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에 연루돼 9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0월 1일 경기도경찰부에 인치되었다.

1930년 11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미결기간을 포함해 6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특사로 10여 일이 감형된 1934년 2월 21일에 출옥했다.

이 사건으로 김복진 외 24인이 구속됐으며 언론에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생활을 하던 중 김복진은 옥중에서 불상 목조를 다수 제작했다. 이곳에서 제작한 목각불상은 형무소 직매장에서 팔기도 했다.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뒤 김복진은 다시 활동을 재개하며 잡지 『청년조선』을 창간했다. 이 무렵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허하백과 결혼했다. 얼마 후 다시 『청년조선』을  출판 자금 출처 조사 명목으로 체포됐으나, 1935년 전주경찰서에서 출소했다. 출소 한 후 김복진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 ‘미전을 보고 나서’를 발표하는 등 미술 비평을 쓰거나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종로 사직공원 인근에 김복진미술연구소를 열고 조각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연재 기사 ‘조소 스케치 백인상’에 초상 조각 8점이 게재되었으며 경북 김천중학교에 ‘최송설당 동상’을 제작했다. 출옥 직후 극단 ‘신건설 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보석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불상습작’과 ‘노인’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제작에 착수했다. ‘조선미술원’을 창설하고 김은호, 박광진, 허백련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안창호 서거 때 제자 이국전으로 하여금 그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를 뜨게 했다가, 또다시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사상운동보다는 조각계 활동에 전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애국공채’와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이어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김복진미술연구소를 처분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고 홀로 일본으로 향했다.

1937년 귀국한 김복진은 종로 사직공원 인근에 자택을 건축했다. 이 무렵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 복원 계약을 맺었다. 이어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나부’가 특선, ‘윌리암스상’이 입선했다. 『조광』에 ‘정축 조선미술계 대관’을 발표해 ‘향토색’ 관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38년 당대 유명 배우인 한은진을 모델로 삼아 설화 속 의로운 기생 ‘백화’를 제작했다.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백화’가 무감사 수상, ‘여인입상’이 특선을 차지했다.

이 무렵 전북 김제 금산사의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을 완성했으며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백화’를 새롭게 제작해 출품, 입선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의뢰로 ‘러들로 흉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1939년 딸 김산용(보보)이 출생했다.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체 A’ 가 입선, ‘나체 B’가 특선을 차지했다.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의 복원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40년 잡지 『조광』에 ‘조각생활 20년기’를 연재했으며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년’이 조선총독상, ‘다산 박영철 선생상’이 무감사를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이 해에 딸 김산용이 이질로 사망했다. 김복진은 딸의 뒤를 이어 타계해 고향인 청주 팔봉산 구암리에 안장되었다. 타계 49일을 기해 김복진을 아꼈던 사람들이 모여 추도회와 유작전이 개최 되었다.

김복진의 작품은 미완성인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비롯해, 금산사 ‘불상’ ‘백화(白花)’ ‘소년’ 등 50여점으로 추정되나 사후에 동생 김기진이 보관하다 6·25전쟁 중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연극단체 토월회에서는 연극 ‘카튜샤’, ‘채귀(債鬼)’, ‘오로라’ 등의 무대장치를 했다. 이때의 장치는 배경화였으나 일본의 무대장치보다 훨씬 앞섰다는 평을 들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1938년 청동으로 제작된 ‘러들로 흉판’과 1935년 ‘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미륵여래입상’ 등을 비롯해 1936년에 만든 금산사 요청의 ‘미륵대불’과 1939년에 정읍 김수곤의 시주 3만원으로 착수한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이 있다. ‘법주사미륵대불’은 광복 이후 윤효중, 장기은, 임천 등의 손을 거쳐 1963년에 변질된 형태로 완성되었고, 그나마 현재는 청동대불로 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복진에게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복진미술상을 추진한 청주시립미술관은 “김복진은 한국 근현대조각사의 올바른 정립과 자리매김을 위해 미술사에 반드시 기록 돼야할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 근대미술사 중에서 조소의 위치는 조선 후기의 조각과 20세기 초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한다. 그 잣대로 김복진의 작품세계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며 “오랜 숙원인 김복진미술상 제정을 통해 김복진의 생애와 작품이 재조명돼 지역미술 발전에 큰 활력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복진 조각 재현 프로젝트 ‘백화’ 2022, 목조, 90×40×40cm(제작 이병호, 장준호)
김복진 조각 재현 프로젝트 ‘백화’ 2022, 목조, 90×40×40cm(제작 이병호, 장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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