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계절의 시계가 제자리를 찾아 겨울에서 멈췄다. 오늘도 짧은 해는 마음이 급한지 벌써 서녘 하늘에 가 있다. 겨울은 정리, 차분, 고요, 겸손이라는 어감으로 다가 온다.

소한이 지난 주말 오후, 근교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찾았다. 도열 해 있는 나무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 놓았다. 명징한 푸른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시원하게 솟구쳐 뻗어 오른 나뭇가지는 지난 계절의 찬란했던 시간을 안고 의연하게 서 있다.

나무 앞에 서니 문득, 유년 시절, 고무 판화에 그렸던 나무가 생각난다. 조각칼에 손을 베여가며 앙상한 나무를 그리고 잉크를 바른 뒤 찍고 또 찍어내던 그림이 바로 이 나무였지 싶다. 검고 어둡지만 힘차게 뻗어 올라가는 나무를 보면 영하 20도 혹한에 웃통 벗고 훈련받는 무적 해병 같다는 느낌이 든다. 추위와 어둠을 묵묵히 견뎌내는 우직함은 차라리 쓸쓸함마저 느껴진다.

얼마 전, 친구가 찾아왔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운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처럼 미끈하고 생생했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의 저 나목처럼 야위었다. 결혼한 아들이 아이 갖는 문제로 부부 갈등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 겨울 음영이 깊게 드리워졌다. 가로수 길을 걸으며 자신들의 선택에 순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위로하였지만,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寂寥])의 순간은 길게 이어졌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불어왔다. 영하의 바람이지만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둘의 마음을 씻기기라도 할 듯 눈이 내렸다. 위초리에서 녹아내리는 물방울은 참은 눈물을 떨구는 것 같아 더 시려왔다. 자손을 잇다는 것은 내가 존재했음을 남기는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씨가 있어야 종(種)이 살아남는다.

메타세쿼이아는 산불이 나서 씨앗이 발아해야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다. 산불에 강한 세쿼이아는 솔방울이 두껍고 딱딱한 껍질 속에 수분을 보관하고 있어 200도가 되어야 솔방울이 터져 씨앗으로 번식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산불을 내기도 한다. 메타세쿼이아가 ‘씨’로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산불 같은 모험을 겪어야 하듯이 대를 잇는다는 것은 본능인 것이다.

하늘만 보고 오르는 메타세쿼이아는 곁가지마저 늠름하다.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젊은 청춘의 양기가 뻗쳐오르는 것 같아 힘이 북돋는다. 아득한 저 끝을 향하여 목마른 질주를 하는 까닭은 그 끝에서야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 향기 어떤가, 피톤치드의 향은 마지막 음식을 먹고 마시는 후식 같은 개운함이 있다.

세상은 갈수록 모두가 죽기 살기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려 애쓰고 있다. 이 힘겨운 자신과 싸움은 자신이 올라간 그 만큼의 높이에서 그 만큼의 시원한 바람과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겨울은 날선, 냉정, 치열, 철벽이라는 어감으로 다가온다.

겨울은 다음 세대를 품기 위해 몸을 만드는 냉혹한 훈련인 동시에 마음도 성장하는 시기이다.

위기를 극복할 겨울이 없다면, 빛나는 봄도 오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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