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의 한류 붐은 막부에 의해 약 200여 년에 걸쳐 그 생명력이 이어졌다.
이 시기 조선에서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가 막부를 왕래했다.

이들이 유학과 시, 회화(그림) 등의 교류를 통해 일본 지식 사회층에 한류 붐을 일으켰으니, 양국 간에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시대가 정착했음이다.

에도 시대의 한류는 고대의 한류인 아스카 시대와 현재 불고 있는 한류의 중간 쯤에 위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류가 일본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몇 십 년 전 일본문화의 복고풍이 절대 아니다.
이미 한류의 씨앗은 1천 5백여 년 전에 일본에 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류 붐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던 이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 내 권력의 변방에 있던 사쓰마와 쵸오슈우(長州-현재의 야마구치현)의 시골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유신에 성공하자마자, “일왕(천황)은 조선왕보다 상위(上位)의 위치이기에 일본을 황(皇)으로 불러주길 원한다”면서 일본국 우위의 불평등 외교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정부에서 이를 거절하자, 곧바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조선을 쳐야 한다”며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온 그들이다.

그들에게 조선은 일본보다 못한 하위(下位) 개념의 신하국으로 멸시의 대상이자 미개한 나라로써 혐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때 형성된 일본 극우세력들의 대 한반도 인식이 오늘날 그대로 이시하라 신타로오 토오쿄오 도지사나 코이즈미 수상의 입을 통해서 간간히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는 역사적으로 ‘형제 간의 증오’ 관계라 볼 수 있다.

냉전시대의 남·북 관계를 ‘친형제 간의 증오(카인 콤플렉스)’ 시대였다고 본다면 한·일 관계는 ‘사촌형제 간의 증오’ 시대라고 평할 수 있다.

이는 아무리 형제 간이라 해도 비슷한 처지에 있어야 우애가 있는 반면, 경제력이나 문화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나면 ‘형제라는 것이 부끄러워’ 일부러 남한테 자신들이 형제임을 감추려는 심리와 같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한·일 관계를 그렇게 본다면, 탈아입구(脫亞入歐·동양을 벗어나 서양 국가로 들어감)를 외치며 서구화에 매진하고 있던 일본이 볼 때 한국은 반 개화국(半開化·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문명관)으로 근대화에 뒤쳐진 부끄러운 형제 국가에 다름 아니었다.

한때는 동종·동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이 연대해 서양의 오랑캐를 몰아내자던 일본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의 후진성과 반 개혁성을 알아차리고는 침략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때문에 유구한 역사 속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사이와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메이지 시대와 쇼오와 시대의 일본인들이 느끼던 한국과 한국인들은 근대화되지 못한 나라로 치부됐지만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 두면 다른 민족에게 조선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못난 형제국’으로 비쳐졌을 지 모른다.

그러니 침략을 하고도 과거사에 대한 사죄가 없음은 물론이요, 오히려 한국을 근대화시켜줬다고 큰소리 치고 싶은 것이 일본 우익의 혼네(본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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