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충청매일] 오래 전 고인이 된 친구가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건 아직도 그가 내 삶에 크게 관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내 사주팔자에 균열을 불러온 사람이다. 피해의식에 짓눌려 있던 내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걸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마치 가슴이 따뜻하고 푸근한 천사 같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 수가 적고 잘난 체를 하지 않을 뿐 감수성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낙천적인데다가 자의식이 강해서 남의 충고나 지적을 귀담아 듣지 않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와 친구가 된 데는 단 하나의 이유에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나처럼 그가 미술에 뜻을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던 해인 고등학교 2학년 중반 무렵이었다. 그는 조용한 첫인상과는 반대로 천연덕스레 일탈을 자행하는 뻔뻔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본 것도, 자율학습을 도망쳐 시내 어딘가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여 본 것도 모두 다 그의 덕분에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미술대학 지망생들은 모두 학원으로 화실로 밤새워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우리는 꼭 대학에 가야만 예술을 하냐고 호기를 부리며 친한 친구네 소유의 달동네 판자촌 2층 창고를 공짜로 얻어 화실을 꾸미고는 제멋에 겨운 그림을 그려대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보낸 1년 동안의 대가는 참혹했다. 학교성적은 곤두박질을 쳤고 미래는 어두워져만 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후로 그때만큼 자유롭고 꿈에 부풀었던 적은 없었다. 삶은 자존감 하나면 족하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무렵이다.

결국 우리는 3학년 여름방학이 될 즈음 현실을 받아들여 대학진학을 결심하였다. 코피가 터지도록 입시공부와 입시미술에 매진한 끝에 겨우 대학을 고를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배움에 재미를 붙여갔지만 그는 그렇질 못했다. 대학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마지못해 졸업을 한 뒤 서울의 한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지냈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때려치우고 가끔씩 내가 살던 시골에 들러 밤새워 술을 마시다 가곤 하였다. 그는 그렇게 어릴 적 품었던 꿈을 간직한 채 잡히지 않는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이 갓 지난 어느 날 칠흑 같은 낯빛을 하고는 배가 산처럼 부풀어 오른 채 병상에 누워 이빨이 흔들거려 아무것도 먹질 못한다고 투덜거리며 병원 옥상에 올라 담배를 피우게 해달라고 졸라댄 지 이삼일이 지난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음은 산 자에게 더 무거운 법이다. 나는 그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걸 안다. 덕분에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못다 한 그의 삶을 나누어 가진 채 살아간다.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려 살고 싶다는 꿈은 언제나 그렇듯 남은 자들의 선택이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해야 할 일에 충실했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세상에 옳은 건 없다. 다만 옳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간 친구의 삶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나 역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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