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골의 새벽은 피반령으로부터 온다
백두대간 곁가지, 이 깊은 산 속 오두막에 겨울밤은 하얀 뭇서리처럼 내려 앉아 있다.
심심풀이로 들여놓은 축생 몇 두는 저절로 산짐승이 돼서 컹컹 승냥이처럼 짖거나 해동천 보라매처럼 날개짓을 한다.
오늘 새벽에는 고라니가 기웃거렸는 지 온갖 것들이 일제히 스테레오로 합창을 하는 바람에 일찍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오두막 옆 산다랑 논은 골짜기를 타고 비뚤어진 가르마처럼 피반령을 향해 기어 들어간다.

새벽 빈 논은 무량하다.
벼 그루터기마다 하얀 서리꽃이 피어오르고 흰 두부판 같은 얼음 논 위로 짐승발자국 흰꽃무늬를 이루고 있다.
충세 아우의 저 다랑 논도 올해 기적처럼 자리를 지켰다.
올 한해 벌써 이 꼴짜기도 수많은 논이 잘려나갔다.
구판장 앞 논은 가내수공업 공장이 들어온다 하고, 참나무배기 옆 논은 지난해부터 채마밭으로 바뀌었다.
방죽 앞은 재활용공장 야적장이 된지 오래다.

논은 우리에게 쌀만 주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대기의 허파이며 자연의 보고 인 것이다.
거기에 담긴 물은 내내 가습기처럼 대기를 적셔주고 서서히 땅으로 스며들어 흐르고 내려앉아 언제나 이 땅을 기름지게 했다.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을 품고 있어 생태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건널목이 돼왔다.
초하의 푸른 논 위에 가만히 앉아 살펴 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피어나고 꼼지락거리고 다녀가고 있는 지.
생이가랠개구리밥 같은 푸르른 부초위로 소금쟁이·물방개·잿두루미·왜가리·논평아리 둥실 물을가르고 봄이면 도롱뇽·개구리 검은 알에 물뱀·우렁이·미꾸리 그리고 가을 메뚜기까지….
여린 봄쑥과 냉이·달래도, 벌금자리도 논둑에 제일 많다. 노란 메주콩도 논둑에 심겨 있어야 제격이다.
여름장마 몰려가고 그 논 위로 파도 같은 바람 일렁일 때 그 한 폭의 움직이는 초록그림은 그 어느 화가가 그려 낼 수 있으랴.
어린 시절 우리들의 청년아버지가 시퍼런 낫을 갈아들고 잡풀 무성한 논길을 베어 들고나면 드러났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정했던 그 오봇한 길을 기억하는가.
곤궁했으나 그때는 그저 마음 놓고 지은 만큼 거둬 들였다. 그 청년아버지는 지금 모두 병들어 있다.

내가 이 산골에 거처를 두기 수 년 전 만 해도 나는 몰랐다. 그저 산길을 달리다 차창 너머로 ‘아! 이 마을은 배산임수가 잘됐구나’ 하며 그림 구경하듯 지나친, 그 그림 같은 토담집 농자들이 다 가슴에 한 무더기 돌맹이들을 안고 그렇게 서럽게 살고 있는 줄을….
노도와 같이 농자들이 일어서고 거리로, 그 차디찬 입동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도 그들의 절망과 희망이 무엇인지 잘 헤아릴 수 없었다.

논농사는 농자들에겐 마지막 보루이며 농사의 근간이다.
논은 우리 정서의 원류이며 생명이며 나라이다.
이 땅의 논이 WTO 나 FTA 같은 국적불명의 외래어 보다 앞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근본이 흩어지면 모든 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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