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해맞이 영상이 하루에도 서너 개씩 붉은 해를 띄운다. 붉은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잠깐이지만 내 작은 소망도 덩달아 떠 오른다. 정초가 되면 마음을 정리하며 지난 한 해 동안 마음속 달항아리를 비운다.

새해 아침, 다시 목표를 정하여 달항아리에 담을 준비를 한다. 우선 원초적인 삶의 일부를 담아본다.

다이어트,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기, 당뇨에 좋은 음식 챙기기, 너무 통속적인 것만 나열하니 부끄러워진다. 올해에 꼭 하고 싶은 것은 세번째 수필집을 출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념이나 이념과 사고를 차곡차곡 쌓아 담아 볼 요량이다.

그동안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글의 의미도 모른 채 2주에 한 번씩 신문에 실리기에 바빴다.

내가 누군지 조차 모르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쓰니 잡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고를 퇴고하고 나면 흡족하지 못한 글에서 달아나고 싶어 멀리 도망치지만, 글에 대한 평가가 나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아직도 글의 늪에 발이 덤벙 빠지고, 미로에 갇혀 애면글면하지만 결국 나를 닮은 애매모호한 작품 속에서 늘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좋은 영화나 인기있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가의 뛰어난 영감에 큰 에너지를 받는다. 이들이야말로 날카로운 바늘로 잠자는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찔러 깨우면서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나와는 결이 다름을 느낀다. 그들의 작품을 볼 적마다 큰 굉음을 듣는 느낌이다.

큰 굉음으로 고막이 먹먹해져 오면 오히려 침묵하게 된다. 침묵으로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필력을 담아내는 이런 작가에게서 고려 백자 같은 천재성에 신선한 충격을 받곤 한다. 그들 같은 백자가 되려면 나는 얼마 동안 갈고 닦아야만 할까,

그동안은 원초적인 삶을 해결하기 위해 타성에 젖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만 고마워할 줄 만 알았지, 정성을 다하는 요리장의 마음, 손님을 위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든 식당 주인, 좋은 식재료를 생산하기 위해 옥토를 가꾸는 농부, 적당한 햇빛과 온도를 내어주는 자연.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보는 눈이 커지고 보는 마음이 커져야 비로소 감동을 일으키는 결과물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구도자가 평생을 헤매다 돌아오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 성능의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들여다보면 자기 뒤통수가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정한 달항아리를 찾는 일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달항아리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끝내 변하지 않는 내면의 세계이다.

글을 쓰는 이유도 자신이 낸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기 위함이었고,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란 것을, 결국, 세상의 모든 예술도, 종교도 나를 찾는 일이다.

나의 세계, 나의 우주, 나의 마음을 담아 나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나의 모습이 곧 항아리 형상으로 남는다.

눈에 보이는 색(色)을 비워야 눈에 보이지 않는 공(空)을 채울 수 있다. 색(色)은 실체이며 공(空)은 곧 에너지다. 에너지는 삶의 동력이다.

올 한 해 동안 달항아리에 정녕, 공(空)이 가득 담기길 바라는 세모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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