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중국 대륙마저 석권한 몽골제국은 5대째 쿠빌라이 한 때에 이르러 원(元)이라 칭하게 됐다. 세조 쿠빌라이(1215~1294)는 고려를 지배 하에 넣고 일본마저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세조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말하는 대로 듣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으나, 사신은 함흥차사요, 일본 또한 원나라의 요구에 거듭 불응하면서 원구(元寇)의 내습에 대비했다.

드디어 원은 일본을 치기 위해 1274년 음력 10월 3일, 900척의 전함에 여·몽연합군으로 구성된 3만3천900여 명이 한국의 합포(合浦)에서 일본점령을 향해 출항했다.

연합군은 5일에 쓰시마를 유린하고, 14일에는 이키(壹岐)섬을 휩쓸었으며, 19일에는 하카다항(博多港)에 근접해 20일에는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일몰과 동시에 바다로 물러났으나, 그날 밤에 불어 닥친 폭풍우로 전 병력의 반수가 넘는 1만7천여 명을 잃고 완전히 퇴각하고 말았다.

2번째의 침공은 7년 후인 1281년 6월에 이뤄졌다. 쿠빌라이는 1275년과 1279년에 두 번이나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수교 통상을 요구했으나 두 번 모두 일본정부에 의해 사신들이 참수 당하자, 그는 분노해 재차 공격을 준비하게 됐다.

즉, 남송병 10만여 명과 군선 3천 500척으로 동로군(東路軍)을 편성하고, 몽골인·중국인·고려인으로 혼합편성 된 4만명과 군선 900척으로 강남군(江南軍)을 편성하니, 총 병력은 14만여 명에 전함이 4천400척의 대규모 군단으로 키타큐우슈우(北九州)를 공격했다.

1차 공격 이후 하카다 항만에 석축을 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왔던 일본군도 용감하게 저항하면서 야밤을 틈타 적군을 베고 전함에 화공(火攻)으로 맞서기에 원나라 군대는 상륙을 포기하고 바다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 때에 또다시 바다에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일본군의 공격도 계속되는 바람에 원나라 군사는 총 병력의 4분의 3을 잃고 무사히 귀환한 수가 고작 3만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규모 병력으로도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기에 일본에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고, 때맞춰 불어 닥친 두 번의 폭풍우를 카미카제라 부르며 신의 보호를 받는 국가라는 인식이 사실로 더욱 믿어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때 여·몽 연합군에 의해 쓰시마와 이키는 물론 큐우슈우 지방에서 많은 일본군과 민간인이 살육 당했음은 물론이다.

이에 일본인들은 원나라를 도와 참전한 고려군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과 함께 혐한(혐고려‘嫌高麗’이니, 결국 혐한)바람이 고대의 모노노베씨에 이어 두 번째로 크게 일어난 계기가 됐다.

두 번의 전쟁에 강제적으로 참전하게 된 고려도 타격은 컸다. 고려는 1차 공격 시에 6천여 명의 수병과 900척의 군선을 차출 당했으며, 2차 공격 때에도 군선 900척에 상륙군(육군) 1만 명과 수병(해군)1만5천여 명을 차출당해야만 했다.

고대와 중세에 걸쳐 불었던 혐한 분위기는 토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군사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는 조선에 침략하기 위해 갖바치, 백정, 조선(造船)기술자 등을 신분이동이 불가능한 천민 집단인 부락민(部落民)으로 묶어두고 농민들이 칼을 차지 못하게 하는 등 10여 년 전부터 치밀하고 철저하게 대비했다.

사무라이 이외의 백성들이 차던 칼을 모두 거둬들여 조총을 만들거나 무기를 만들어 임진왜란 때 사용됐음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을 위해 놋숟가락까지 빼앗아가던 수법과 너무나 비슷해 소름마저 끼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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