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머지않아 90을 바라보는 필자의 아버지 생신이다. 필자의 할아버지가 73세에 세상을 뜬 것에 비하면 꽤나 장수하고 계신 셈이다.

그런 아버지가 젊었을 때 술과 담배를 즐겨할 당시 형제들은 해마다 연초가 되면 부친의 절주 금연을 요구했었다. 그럴 때면 늘 “아버님(필자의 조부)은 술과 담배를 하셨어도 73세나 사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할아버지 만큼만 살겠다는 말씀과 또 하나는 아내인 어머니보다 먼저 생을 마감하겠다는 말씀이셨다.

모두에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이 가부장의 권좌에서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을 스트레스 받게 하며 살았는 지 알게 해주는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다음의 ‘천생연분 노부부’의 유머가 이를 반증해준다.

할아버지 할머니 퀴즈대회에서 금슬 좋기로 소문난 노부부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제시된 단어를 할아버지가 보고 설명하면 설명을 들은 할머니가 답을 맞추는 게임 방식이었다.

이때 할아버지에게 제시된 단어는 ‘천생연분’이었고 이를 본 할아버지는 설명에 들어갔다. “우리 같은 부부 사이를 뭐라 하지?” 하니 이를 들은 할머니가 즉시 대답했다.

“웬수!”. 황당해 진 할아버지가 “아니 그게 아니라 4글자로 된 말 있잖아…” 하니 한참 생각한 할머니가 “평생웬수”라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만을 위해 평생 살아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는 더없는 천생연분의 사이이지만 아내, 아니 여자인 도리로써 살아와 준 할머니들에게는 평생웬수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 당신들은 어머니를 웬수로 생각하지 않는 데 왜 여자들은 남편들을 웬수로 생각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답은 전술한 필자의 아버지 이야기 중에 나타난다. 그것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싶다고 하는 말에 함축돼 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유아처럼 행동하고 아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가 하면, 여자는 더욱 더 강해지고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순응하고 독립심도 강해진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독립하려고 하는 데 돌봐달라고 매달리는 큰아들(할아버지)이 있으면 귀찮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귀찮게 하는 만큼 웬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할머니의 외출이 부자유스러움은 물론이거니와 할머니 친구들의 방문이 어려워지고 당신이 차지했던 안방마저 빼앗기게 되니 당연히 그럴 법도 하다.

일생을 연령 또는 계급질서 속에서 살아온 이 땅의 할아버지들이 서서히 계급사회에서 밀려나게 된 현대사회에서 마지막 보루인 안방을 차지하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할머니들에 대한 행위가 결국 할머니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차라리 과거 전통사회에는 안방과 사랑방이 있어 각자 자신들의 점유공간에서 만큼은 자유롭고 독립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가옥구조가 할아버지들로 하여금 할머니들을 가까이에서 늘 조종할 수 있는 리모컨을 쥐어준 셈이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진 할아버지들이 할머니 없이는 하루도 불편해서 살 수 없는 의존적인 생을 살 수밖에 없으니 천생연분임이 마땅하고, 그에 반해 할머니들은 끝까지 시중만 들다 가는 처지가 되니 웬수로 느껴질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가 아직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천생연분’ 어머니가 아직도 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주며 살아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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