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미술가

그리기는 단순히 평면 위에 물감을 칠하는 유희를 넘어 의식과 무의식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때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작의적인 느낌이 앞서 타인과의 교감은 물론 솔직한 감정표현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때로는 계획에 없는 표현이 더 솔직할 수 있는 건 감성의 전달이 사전에 의도된 절차나 방법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의 표현과 전달을 위해서는 자신의 의도에 적합한 표현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처럼 예술표현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의 일치는 작가의 진정성과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예술가의 과업 중의 하나이다.

예술가에게 예술작업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다. 만일 예술가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예술 본래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한 채 기술과 기능의 경지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평생 중국의 그림을 원작자 못지않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던 조선 말기의 화가 장승업을 가리켜 비운의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렇다. 당시의 장승업에게는 중국의 화가들이 보여준 예술세계야말로 의심의 여지없는 완벽한 예술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장승업 개인 뿐 아니라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의 한계이기도 했다.

다만 그럴수록 왜 더 이상 자신의 예술세계를 꿈꾸지 않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조차 깨우치지 못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비단 예술분야에 국한되지는 않았을 터다.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사로잡혀 성장과 발전을 이뤄내지 못한 대가는 결국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라는 참혹한 역사를 겪어야 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국가의 흥망이 창조성 교육에 달려있다는 말은 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다. 다만 그 말 어디에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다. 오로지 당면한 과제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창조성은 단순히 낯설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성질이 아니다. 제도적 장치나 과정이 주어진다고 해서 배양되거나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아실현의 동기를 깨우치지 않는 이상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창조는 영문도 모르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인간자신의 욕망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한 질문이고 노력이다. 무엇이 진정한 자신의 욕망인지를 간파하는 노력이야말로 창조의 핵심인 것이다. 예술이 창조를 근간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의 노력이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있는 거라면 이는 예술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치고 싶은 욕망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장승업이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되지 않는 이유는 기술과 기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창조성을 외면한 까닭이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까닭에 평생에 걸친 노력이 허망해지고 만 셈이다. 그것이 어디 예술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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