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후반부터 교직에만 전념…친일 오점 남기지 않은 작곡가
어린이 문화운동·동요보급 운동 선구자로 창작동요 마중물 역할
조선 가요협 활동 통해 가요시 운동 등 한국 근대음악 발전 기여
여성교육·동요 가수 양성으로 한국 동요 정착기 저변 확대 주목

 ‘자료발굴로 살펴본 정순철의 생애와 작품’ 연구에서 정순철의 위상정립과 생애복원이라는 화두를 던진 임기현 충북연구원연구위원.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임기현 충북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료발굴로 살펴본 정순철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연구에서 정순철이 우리나라 동요사(史)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친일의 오점을 남긴데 반해 정순철은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동요 작곡가라는 점이다.

잘 알려진 동요작곡가 홍난파, 박태준, 윤극영, 현제명, 김성태, 이흥렬 등이 일제 부역이라는 크고 작은 오점을 남겼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활동했던 색동회 동인 정인섭, 이헌구를 비롯해 정순철과 같이 작품활동을 했던 이광수, 김기진, 이원수, 최영주, 김동환, 이은상, 안석주(안석영) 등 많은 동료가 친일에 연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철의 거리두기와 비타협적 태도는 크게 주목받아야 한다.

정순철은 1930년대 후반부터는 대외적 활동을 자제하고 교직 생활에만 전념했다. 1938년부터 학교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권덕규가 작사한 교가를 외워서 써야만 음악 점수를 주었다. 그는 일제 말 군국주의의 상황에서 이러한 교가 외워 쓰기를 통해 학생들이 우리말과 우리 정신을 지켜나가기를 바랐다.

둘째, 정순철은 어린이 문화운동과 동요보급 운동의 선구자다. 임 연구위원은 “일제에 부역한 인사들을 비판하는 것 이상으로 엄혹한 상황에서도 훼절하지 않고, 민족적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했던 정순철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순철은 어린이날 행사 준비위원으로, 어린이 운동의 분열과 일제의 탄압으로 행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록상으로 드러난 그의 활동은 색동회 회원의 자격으로 제1회부터 제5회(1927)까지 어린이날 행사 준비위원을 맡았다. ‘어린이날’ 하루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 공들여 짜임새 있게 준비한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이를 어른에 예속된 소유물이 아니라 당당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 이를 전 사회적 국민적으로 각성케 하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되도록 했다.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세계아동 예술전람회를 개최(1928.10.2.∼8.)했다. 무려 4년에 걸친 준비와 40여 명 철야의 노력으로 행사를 진행, 전 세계 20개국 아동 작품, 3천점을 전시, 사상 유례가 없는 아동 예술 전시회로 정순철은 진열부를 맡아 활동했다.

또 전 조선 유아 작품 전람회를 개최(1932.6.8.∼10.)했으며 경성보육 녹양회의 동요 동극 운동을 전개했다. 정순철은 경성보육학교 재직 시 색동회 동인들을 중심으로 이번에는 유치원생으로 그 대상을 한정하여 두 달 가까이 아동들의 회화 및 만들기 전시회를 준비, 전 세계 8개국의 작품을 포함하여 총 1천829점을 전시했다. 

정순철은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 1931년에서 1933년까지 경영난에 처한 경성보육학교를 인수해 운영, 특히 이 기간에는 정인섭, 이헌구와 함께 녹양회 활동을 통해 아동극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아동극 보급과 그 수준 제고에 정순철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순철은 동요보급 운동의 선구자로서 창작동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색동회 회원으로서 그는 방정환과 함께, 동요 소개에 앞장섬으로써 한국 동요의 도입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대 동요 평론가인 구옥산은 방정환과 정순철 등이 한국 동요사에게 끼친 기여를 인정, 그들 의 노력으로 경향으로 퍼지게 된 동요곡들을 ‘조선동요음악운동의 첫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 동요의 창작과 확산에서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순철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동요보급을 위한 일이라면 전국의 현장을 누볐다. 서울을 비롯해 함경도 원산에서 울산까지 천도교기념관, 도서관 아동실, 아동도서실, 초등학교 강당 등  어린이가 있는 곳이면 가서 동요 독창을 하고, 동요 부르는 방법을 시연, 또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왜 어린이에게 동요가 필요한지를 강연했다. 확인된 현장 방문 기록만 24회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현장을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 연구위원은 “쉽고 아름다우면서도 기초적인 어휘로 된 동요 부르기는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아이들, 우리 국민이 우리말과 우리 정서를 잃지 않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며 “ 해방 이후 노래동무회 등을 통한 현장 활동은 일제 말 우리말 사용 금지로 크게 위축된 한국어를 되살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정순철은 동요보급을 위해 수시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 전 국민에게 동요를 전파하기도 했다. 1926년 경성방송국 예비방송 시기부터 1935년까지 총 53회 직접 출연해서 동요를 직접 부르고, 동요가 왜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직접 동요 부르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 라디오의 동요 방송은 일제하의 공식 제도 교육에서 ‘일제의 창가’에 밀려난 우리 동요가 각 가정에 뿌릴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로 우리 정서를 담은 동요는 식민지 상황의 민족에게 큰 위안과 울림을 주었으며, 전 국민이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셋째, 정순철은 조선 가요협회 활동을 통한 가요시 운동 등 한국 근대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정순철은 건전한 조선 가요의 민중화를 표방한 조선가요협회의 발기 동인 및 작곡부 간사로 참여했다. 문학인과 음악인이 만나 품격을 갖춘 한국 가요의 제작과 보급에 노력했는데, 작곡부에 속한 정순철이 이 시기에 작곡한 곡은 5곡 이상으로 추정되고, 이 중 ‘종로 네거리’는 현재도 음원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정순철은 가곡 및 성악가로 활동하며 가곡을 작곡했고, 성악가로서도 활동했다. 정순철은 쥘 마스네의 ‘비가’와 자작곡 ‘고성’(1927)을 비롯해 자선 행사를 포함한 각종 행사에 출연하여 독창을 불렀다. 이때 부른 곡은 동요가 아닌 일반 성악곡일 개연성이 높다.

정순철은 동요극 및 아동극, 음악·무용극 ‘포-기’의 작곡을 담당하기도 했다. 1930년대는 아동극이 활발했던 시기로, 특히 이 아동극의 확산과 보급에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색동회가 운영한 경성보육학교의 녹양회가 큰 역할을 했다. 정인섭은 이 시기에 동요극 ‘허수아비’를 비롯해 다양한 아동극 각본을 썼고, 정순철은 이 동극에 삽입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특히 해방 이후의 ‘금강산’은 아동극으로는 총 5막극의 대작으로 10여 곡의 노래가 포함된 일종의 ‘악극’으로 뮤지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도 현재 정순철의 것으로 확인되는 ‘물새’를 제외하고도 다수 곡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순철은 단순히 아동극이라는 한 장르 발전에 기여한 부분을 넘어서서 이야기와 노래, 춤이 함께하는 종합예술의 극양식을 통해 아이들의 가치관과 심성, 예술적 감수성 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

정순철은 아동극 중에서도 뮤지컬에 가까운 ‘금강산’, 한국 최초의 음악 무용극 ‘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극음악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음악과 극의 외연 확장에도 기여했다.

넷째, 정순철은 여성교육과 동요 가수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다. 청년기인 1927년 만 26세에서부터 만 49세가 되던 1950년 9‧28수복 당시 납북 때까지 1939년을 전후한 잠깐의 일본 체류를 제외하고는 교사로서 생활했다. 그 기간은 총 22년 정도가 된다. 유명교사로서 정순철의 행적은 언론에서 꾸준히 다뤄졌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경계로 당시 존속했던 매일신보나 국내 일본어 신문에 일절 드러나지 않는다. 당시 언론 자료를 보면 많은 학교의 학생들과 합창단 등이 일제의 관제 행사에 동원되었고, 1940년을 전후해서는 기존의 동요 동극대회조차 ‘봉축음악무용회’로 변질됐다.

정순철은 음악(작곡) 담당 교사로, 중동학교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학교(보육학교 포함)에서 근무한 특징이 있다. 따라서 여성 교육이 주목받지 못하던 시대, 여성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로서의 면모와 함께 일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조선인의 교육 현실, 특히 크게 뒤떨어졌던 여성 교육, 그 현장을 지킨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순철이 가장 오래 근무한 학교는 1927년 4월부터 1938년 8월까지 10년 이상 근무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다. 1930년대 동덕여자고보의 슬로건은 ‘신여성이 되어라. 되되 조선의 신여성이 되어라’였다. 이른바 ‘신여성’으로서 교육과 사회진출에 대한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임 연구위원은 “학교를 대표해서 언론에 오르내린 명사로 경성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유명세를 탔던 그는 교사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노래는 기생들이나 배우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음악교육, 동요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특히 합창단을 지도한 사실을 주목할 수 있는데, 윤석중은 일제강점기 “동덕여고(정순철) 합창단이 방송을 통한 동요보급에 힘을 기울였다”고 말한 바 있다.

정순철은 일제강점기 3대 보육학교 중 경성보육에서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시간강사로 재직했고 일제 말기에는 중앙보육에서 근무한 사실이 확인됐다. 양 보육학교 중에서도 정순철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는 경성보육시기다. 정순철이 재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말기 중앙보육학교 주최의 각종 행사도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 일제 군국주의 통치에 동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색동회 회원들은 당시 유일선 목사가 운영하다가 경영난에 빠진 경성보육학교를 인수, 교장은 최진순, 교감은 이헌구, 전임교원으로 최영주, 정순철은 조재호, 정인섭 등과 시간강사로 출강했다.

색동회 회원들은 “이미 소파는 떠나갔지만, 그 정신으로 경성 보육을 키워나간다는 비장한 각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했으며 경성보육을 꾸려나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헌구는 “時間(시간) 강사 중에도 가장 열성을 다하던 정순철 형”이라고 표현할 만큼 정순철은 동덕여고 교사와 경성보육의 시간강사로 분주한 날을 보냈다.

당시 보육학교의 방침은 “졸업생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취직을 하도록 노력하고, 그리하여 조선 각지에 헤어져서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잘 가르쳐 장래의 훌륭한 조선의 소년들을 교양함에 주력”하는 일이었다.

이 밖에도 정순철은 경성보육의 녹양회 활동을 통해, 동요·동화의 밤, 동요·동극의 밤 등을 개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행사는 학교 행사를 넘어 장안의 화제가 될 만큼 큰 행사였다. 실제로 제1회(1931)는 조선일보, 제2회(1932)는 동아일보 학예부의 후원을 받아 진행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동요의 실험, 특히 대화동요, 원아 동요의 개발에도 힘썼고 유아 보육을 위한 전문 잡지 『보육시대』의 발간 등에도 집필자로 참여했다.

정순철은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저속한 유행가가 횡행하던 시기에 여학생들이 유행가보다는 ‘곱고 아름다운 동요’를 많이 부르기를 바랐다. 중등 여학교에서도 그가 정규 음악 과목인 ‘창가’ 외에 우리 동요를 열심히 가르쳤음은 경성방송국이나 동요대회에 함께 출현해 동요를 부른 제자나 합창단의 면모에서 확인된다.

동덕여고보에서는 유명 동요 가수로 활동한 서금영(1910∼1934)과 김영복을 길러냈다. 윤석중은 “서금영은 서기영(동국대 교수 역임) 누님으로 동덕학교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그 학교 음악 교사 정순철이 길러낸 동요 가수로, 홍난파 동요를 컬럼비아 레코드에 불러 넣었으며 앞날이 크게 촉망되던 터였다”라고 밝힌바 있다. 서금영이 정순철과 함께 출연한 사례로는 색동회 동요회 개최(조선, 1930.11.16), 라디오 방송(조신·경성, 1931.6.10.)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윤석중은 “동덕 학생 김영복은 김형준(음악 교사, 봉선화 작사자)의 딸이자, 피아니스트 김원복(전 서울대 교수, 예술원 원로회원)의 동생으로 동요를 잘 불러 정순철의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라고 했다.

경성보육학교에서도 정순철은 최옥희와 박금례 등의 동요 가수를 양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최옥희는 1933년 봄에 졸업한 학생으로 각종 동요 동극 대회와 경성방송 라디오에 정순철과 함께 출연한 사례가 6회 정도로 확인된다. 최옥희는 각종 언론 등에서 성악을 잘하는 학생으로, 사회의식이 높은 학생으로 주목받았다. 정인섭과 정순철이 함께한 아동극에서 주인공을 맡은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1932년 봄에 경성보육을 졸업한 박금례 역시 정순철이 재직 당시에 양성한 제자로 정순철과 함께 동요동극의 밤과 경성방송에 출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졸업 후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면서 경성방송에 출연해서 피아노 반주자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조선, 1933.5.19.), 또한 훌륭한 보육교사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동요 가수’의 양성은 한국 동요 정착기에 그 저변을 확대하고 널리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임 연구위원은 “충북 출신 동요작곡의 선구자인 정순철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10여년 전 도종환 의원이 물꼬를 튼 후 재조명되고 있지만, 자료발굴과 위상 정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순철은 험난한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이후에도 이념에 휘둘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직 한민족 어린이에게 좋은 동요를 보급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번 연구에서 다양한 자료를 발굴했지만, 아직 더 많은 자료발굴과 후속 연구를 통해 공백기의 생애를 제대로 조명하고 동요사에서 정당한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일제강점기 4대 동요 작곡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훈, 기념사업 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나 자치단체의 관심과 이의 실현을 통해 정순철의 선구자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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