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그런 나에게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선뜻 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중 이미 오래 전부터 미술을 통해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술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관객을 의식한 매우 전략적인 표현행위다.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해왔던 것이다. 그런 내가 쉽사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생각이 얕고 글의 완성도가 부족하여 부끄러움을 겪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서다.

글이란 오랜 동안 숙련된 문장과 어휘를 구사할 줄 알아야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20장 이상의 글을 써야만 ‘직업인으로서의 글쓰기’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충고에 따르면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옳다.

그런데 만일 글을 잘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면 어찌해야 할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다 대고 황급하게 소리치는 이발사라 해도 문장의 형식을 내던질 수는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과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가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평생 미술에 특화된 처지로 살아온지라 글쓰기에 의존할 까닭이 없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 사용에 낯 설은 것처럼 미술이 아닌 글로 표현하는 일은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의미만 남발하기 일쑤다. 고작해야 작업의 변을 늘어놓은 게 전부여서 문장의 구성이나 어휘가 지루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술작업을 해온 덕에 내적 동기를 스스로 인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우친 점이다.

미술에서의 형식과 내용은 작가의 의도와 표현의 방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두 가지를 절묘하게 일치시킴으로써 많은 예술가들이 차별화를 이루게 된다. 어떻게 표현했는가는 형식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왜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설명하는 주된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제까지 읽었던 글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들은 모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진 것들이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글을 써보라는 제안에 응하게 된 데는 분수도 모르고 자신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에 두려움을 잊은 탓이지 싶다.

따지고 보면 글이든 미술이든 모든 표현행위의 목적은 동일하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기로 작정한 지금 그동안 미술작업을 하면서 품어온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런 연유에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려면 타인으로부터의 이견이나 반론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면 생각이 움츠려질 뿐이니 애써 합리적이지는 말자. 무슨 말을 왜 하고 싶은 건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운 좋게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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