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청주시 경덕초 교감

 

몇 달 전 교육비 지원 학생 선발을 위한 회의를 했다. 중위소득 80% 이하 가정은 학부모가 직접 지자체에 신청해 교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회의는 교육비 지원 신청을 못했거나 갑작스러운 가정사로 어려운 처지가 된 학생들을 자체 발굴하려는 취지로 소집됐다. 담임교사는 수업, 상담, 관찰을 통해 기록한 학생 추천서를 제출했고 위원장인 나를 포함한 10여명의 학생복지위원회 소속 교사들은 이를 검토했다. 부모의 실직, 오래된 빈곤, 한부모 가정, 학생의 투병 등 불운은 다양하고 다채롭게 뒤엉켜 있었다.

위원들은 사연에 비해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냈고, 아직도 복지 사각지대가 많다는 이야기도 하고, 추천서 사연과 배경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위원들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다가 불현듯 나 자신에 대한 현타가 왔다. 위원들과 같은 시선으로 인간극장을 시청할 게 아니라 위원장으로서 냉철하게 사안을 검토하고 공정하게 심사해야 한다는 관료로서의 자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추천서에는 가슴 아픈 사연만 있지 이를 뒷받침할 어떠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었다. 누가, 언제부터,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증명서와 수치가 없는 것을 심사 자료로 인정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위원회 제출 자료라면 모름지기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통계와 수치를 제시해야 하고 감성으로만 결정하는 것은 공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향후 학교감사에 회의 결과를 제출할 수도 있으니 위원들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것이니만큼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담임교사가 부모의 투병으로 저학년 학생 혼자 집에서 오래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하마터면 감동해 바로 지원하자고 할 뻔했지만, 곧바로 이성을 찾아 교사들에게 신중하자고 다그쳤다. 나의 설교조의 화려한 말빨에 동정 가득했던 교사들의 표정은 냉정한 전문가의 얼굴로 돌아왔다. 결국 추천된 학생을 지원하되 가정 형편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도 첨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나는 관료로서 소임을 다한 것 같은 개운함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내린 것 같은 뿌듯함에 취해 담임교사의 표정은 잘 살피지 못했다.

며칠 후 담임교사는 나를 찾아와 하소연했다. 병중에 있는 학부모에게 지원금을 위한 입증자료를 보내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추가 자료까지 내는 거였다면 차라리 추천서 쓰지 말 걸 후회가 된다고 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우격다짐으로 쌓아 올린 나의 냉정하고 허술한 논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앞에 두고 얼마나 절박한지를 먼저 증명하라고, 그게 절차라고 주장한 나의 허세에 진저리가 쳐졌다.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보다 무조건 반사처럼 자비와 포용심을 먼저 발동한 담임교사 볼 면목이 없었다. 나는 관성적이고 영악한 일처리를 전문성으로 포장했고, 담임교사는 소박한 진심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음날, 증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 적힌 담임 추천서만으로 지원하기로 다시 결정했다. 당사자가 자신의 재난과 불운을 증명해야만 도와주는 Give and Take 원칙에 숨은 비정함을 나는 보지 못했다. 절박한 자의 상황을 통찰하고 절묘하게 지원을 요청한 담임교사의 단순 명료한 Give First가 진짜 지원이라고 크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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