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청주시 경덕초 교감

개학을 하는 첫 날 거대한 트럭이 교문을 들어왔다. 학기 초에 들어오는 교과서 수거 트럭이다. 교과서는 교재의 하나일 뿐이고, 교육과정 재구성 수업을 많이 한다 해도 교과서는 여전히 학교와 수업은 필수적이다. 코로나 절정기에는 교과서를 드라이브 쓰루로 주니, 워킹 쓰루를 하니, 가정으로 배달을 해서라도 학생들의 손에서 나름 대접을 받았는데 몇 달 만에 아무렇게나 포개져 트럭으로 던져졌다. 학생들은 자신이 어깨로 모시고 다니고 양팔로 들고 날랐던 무게만큼 교과서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몸소 체험했을까 궁금해졌다.

이사 다닐 때마다 가장 무겁기도 하고 자리도 많이 차지했던 책들을 자랑처럼 끌고 다니다가 해외 이사를 가면서 시댁에 수십 박스의 책을 맡겼다. 아들 가족이 공부하고 읽던 책이라고 햇빛에 바랠까, 상할까 베란다에 모셔두었던 책 박스는 작년 겨울 시골 아궁이에서 결국 장렬히 산화했다.

학교와 집에서 처분한 책들은 지구 어딘가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던 아름드리 나무였을 것이다. 왕성하게 뻗어 일가를 이루고, 군락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알며, 빛과 물을 영리하게 조절해가며 살아갔을 나무들이었다. 툰드라에서는 뾰족하게, 열대에서는 둥글게 몸을 만들어가며 지구를 푸르게 하던 나무 자신들에게는 이름이나 국경 따위는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나무에 이름을 짓고, 종류를 구분하고 국적을 부여한 것은 나무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생태계의 생산자로서 충분한 나무들을 책으로, 장식으로, 생필품으로 베어내거나 국가나 집단의 상징으로 추앙하기도 하고, 쓸모없는 듯 방치시키는 일들은 필요와 쓸모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이다. 시대와 관점에 따라 쓸모의 기준이 바뀌어 어제까지 칭송받던 소나무가 광복절을 맞이하여 일본 소나무라고 잘려 나간다거나 나무에 스토리와 의미를 부여해 직책을 부여하는 등의 사례는 매우 많다. 쓸모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어제의 논리를 배반하는 태도가 오히려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학교는 부품을 만들거나 퍼즐의 조각을 제작하는 듯이 학생을 쓰임과 쓸모에 따라 주문 제작하는 곳이 아니라 배울 권리를 누리는 곳이다. 그러니 누가 더 쓸모 있는가, 무엇이 더 쓸모 있는 것인가 보다는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지원과 친절을 누리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쓸모를 위해 극기를 훈련하고, 강박적으로 비교하고, 자신을 몰아세우고, 쓸모 그룹에 속하기 위해 과도하게 개성을 깎아내는 습성은 타인 또한 쓸모에 따라 날카롭게 배제하게 되어 결국 모두가 쓸모의 도돌이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구구단을 못 외워서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2학년에게, 운동을 못해서 체육시간에 투명인간 취급 받는다는 남학생에게, 컴퓨터를 못해서 교직에서 쓸모없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원로교사에게 고전의 쓸모논리를 말해본다.

정약용의 '용지허실(用之虛實)' 과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말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다 쓸모가 있으니 결국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힘이 되기를 바래본다. 당장의 쓸모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배를 내밀고 턱을 올리고, 자신에게 말해보자. 너의 쓸모와 내 쓸모는 다르다고. 내 쓸모는 내가 결정해보겠다고.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겠다고.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그래도 머 할 수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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