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기원전 670년 춘추시대, 대륙 남쪽의 초(楚)나라는 문왕 무렵에 이르러 나라가 크게 발전했다. 물자와 인구가 많다 보니 그 덕분에 군대가 아주 강했다. 이때부터 장강과 한수 지역에 있는 작은 나라들은 초나라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

어느 날 초나라 군대가 신(申)나라를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빠른 길로 가고자 등(鄧)나라를 지나가려 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허락을 요청했다.

“우리 초나라 군대가 지나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등나라에 피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등나라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신하들이 군주 등후(鄧侯)에게 아뢰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초나라 군대가 우리 땅을 통과하는 걸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우리 등나라를 점령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나서서 아뢰었다.

“초나라는 강대국이니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오니 군주께서 만일 통행을 허락하시면 우리 군대에 비상대기를 명해야 합니다. 만일 저들이 시비를 걸어온다면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병력은 작으나 지리적 유리함을 이용한다면 초나라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군주 등후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자니 막상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초나라와 싸운다고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등후가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지리적 유리함을 가졌다고 해도 어찌 초나라를 이긴단 말인가! 방금 들은 의견은 없던 일로 하겠다. 그러니 초나라를 막을 생각을 말고 싸울 생각도 말라. 신하들은 그저 초나라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잘 협조하라.”

그렇게 등후는 초나라가 지나가도록 통행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초나라 군대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이 등나라를 지나갔다. 하지만 등나라를 지나자 이웃 나라인 채(蔡)나라를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그리고 초나라는 예정대로 본국으로 향했다. 등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초나라가 남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등(鄧)나라를 기습 공격하였다. 등나라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순간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군주 등후는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죽기 전에 등후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죽을 일이라면 한 번 싸워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면 등나라가 이렇게 무참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등나라가 망하자 선비들은 이렇게 탄식했다.

“침략자를 경계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안일한 생각이다. 그것이 등후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고일지복(苦逸之復)이란 사람이 안일하면 그 반동으로 괴로움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멧돼지가 마을에 나타나면 사납게 경계해야 손해를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지나가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하면 그때는 재산을 손해 보고 쓰라린 고통을 당하기까지 한다. 물론 마을 어귀를 어슬렁댔을 때 조금 더 철저히 경계했더라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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