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지난주 일요일, 큰 오라버니 칠순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이 모였다. 오라버니는 2남5녀 중 세번째로 장남이다.

여든이 된 큰 언니와 일흔일곱이 된 둘째 언니는 건강상 불참하였고, 둘째 오빠 내외는 오미크론에 재감염이 되어 참석하지 못했다.

큰 오빠는 아들 두 명을 두었고 큰아들이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예약된 방에 들어서니 ‘김00 아버님, 박00 어머님의 장남 김00 님의 고희연’이라는 현수막이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토목을 전공한 오라버니는 평생을 건설 현장에서 살았다. 군대 전역 후 H사에 입사하여 40여 년을 국내와 해외 지사 현장에서 근무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지사로 발령받는 바람에 신혼부부가 서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퇴직한 후 올케와 함께 오순도순 살 줄 알았는데 정이 그리운 오라버니는 시골 부모님이 사시던 고향 집에서 문전옥답을 살피며 사시고 올케는 서울에서 생활하며 주말부부로 지내신다.

도시 생활이 편한 올케와 시골 생활이 편한 오라버니와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음을 인정하며 서로가 편한 생활을 택한 것이다. 평생을 떨어져 사는 것이 숙명 같기도 하다.

과거 1970연대에는 한국이 중동지역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H사는 거대한 공사 수주로 해외 공사가 활발했다. 집안이 그리 어려운 형편이 아님에도 해외 건설 현장을 선택한 오라버니는 장남으로서 부모님에게는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누님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임을, 동생들에게는 떳떳한 오라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장남의 위치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인가 보다.

아버지는 노후에 천식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발작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오라버니가 옛 소련에서 구해온 웅담을 얇게 저며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곤 하셨다. 그러면 바튼 기침이 멈추면서 이내 가라앉았다.

“큰 애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여.”

아버지는 오로지 웅담에 건강을 맡기고 사셨다. 옛 소련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오라버니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아버지를 위해 웅담과 천식에 좋다는 약을 구해오신 덕에 아버지는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천수를 다하시고 돌아가셨다.

장남으로서 어깨가 짓눌린 듯 무거울 때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사랑도 더 받으며 살아온 건 사실이지만 맏이는 출생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라버니가 받은 산업훈장은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뿐 아니라 의관을 갖추고 예를 다해 살아온 장남에 대한 보상이었으리라, 미국에서 근무하는 큰조카가 아버지의 고희를 맞기 위해 잠시 들어온 것도 또한 장남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고희 앞에 선 오라버니 얼굴에 지난 세월의 연륜이 고스란히 느껴져 온다. 자신은 없고 장남으로만 살아오신 지난 70년의 모습이 고귀한 훈장처럼 빛났다. 이제는 장남이라는 묵직함의 외투를 벗어 놓으시고 남겨진 시간은 자신을 위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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