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청주시 경덕초 교감

[충청매일] 아버지가 데려온 녀석은 태어난 지 20일 정도 된 강아지였다. 없는 살림에 줄줄이 사탕 삼남매 키우기도 힘든 데 강아지까지 데려왔다고 불평하는 엄마와 달리 삼남매는 이산가족 상봉한 듯 감격하였다.

아버지는 첫째이자 모범생인 오빠에게 강아지 이름을 지어보라고 했고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전교 1등 오빠는 강아지 이름을 ‘Bright(영리한·빛난)’로 정했다. 1980년대 골목을 누비던 ‘누렁이, 메리, 케리, 쫑’이라고 불리는 동네 개들 틈에서 브라이트라는 이름은 튀어도 많이 튀었지만 부모님은 오빠의 결정에 뿌듯한 얼굴로 동의하셨다.

브라이트는 밥 먹고 책상에만 앉아 있는 오빠 곁에 앉아 있거나, 시도 때도 없이 노래 연습하는 언니와 함께 목을 빼고 노래 부르거나, 동네 공터에서 손이 벌게지도록 놀던 나를 깨워 집에 데려가곤 했다.

라이트는 그렇게 12년간 우리의 숱한 다툼, 변덕, 희로애락을 지켜본 후 떠났다.

올해로 6살이 된 포미는 포항 호미곶 등대박물관에서 만났다. 박물관 담벼락에 붙은 ‘아기강아지 무료 분양’ 손글씨를 보고 들어간 마당에서 어미를 타넘으며 놀고 있던 포미는 그날로 우리 가족이 되었다. 브라이트도 포미도 강아지들의 자유연애로 탄생한 소위 똥개, 믹스견이라 사람과 비슷하게 먹고 살던 브라이트에 대한 기억과 경험으로 어린 포미를 대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만 자던 포미가 울고, 이가 빠지고, 털이 빠지고, 살림을 다 물어뜯고, 몸집이 커가는 시간을 견디며 누가 포미 데려오자고 했냐고 가족끼리 매섭게 서로를 비난하기도 했다.

요즘 동네에 부쩍 많아진 귀족 부인처럼 우아한 강아지들 틈에서 세상 신나는 표정으로 뒷발질 하는 포미에게 견주들은 “강아지에요?”, “종이 뭐에요?”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한 때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 아닌 포미가 창피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하이브리드 강아지라거나 다문화 강아지라고 대답한다.

브라이트나 포미와의 시간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란 강한 인간이 약한 강아지를 돌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상식을 바꾸었다.

생명은 사육하는 게 아니고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게 되고, 이들에게서 받은 기억과 위로를 통해 일방적인 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대가 누구든 관계를 맺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의 동심원은 살짝 커진다. 기존의 구분과 통념은 한겨울 얼음장 깨지듯 갈라지고 넓고 풍성해진 포용의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모두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이동하기 때문에 어느 때는 남의 좌표와 겹쳐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완전히 어긋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위치를 옮겨 다니며 서로의 신발을 자주 바꿔 신을 때 세상은 더 넓게 회전한다. 이미 작아진 낡은 신발 안에 나를 구겨 넣거나, 오래된 신발 탓만 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내 신발을 바꿀 때가 되었는지 가만히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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