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산고 교감

내가 사는 충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면서 남한강과 충주호로 둘러싸여 있어 물의 도시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크고 작은 물난리를 겪었다. 장마철만 되면 강물이 넘쳐 피땀 흘려 일군 농토가 물에 잠기어 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머니의 허망한 눈빛이 기억난다.

괴산에서 흘러오는 달천강이 크게 휘어 돌아가는 강변에 물이 닿지 않는 갈대밭이나 잡초밭이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을 개간하여 고구마도 심고 땅콩도 심었다. 농사 지을 땅 한 평 없던 우리도 강변의 돌밭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었다. 집에서 한참을 걸어가 수많은 돌을 골라내고 땡볕에 잡초를 뽑아내며 곡식을 키웠지만, 장마 때문에 온전히 수확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생활하수가 강으로 그냥 흘러가던 때였기에 장마철이면 물이 역류하여 마을길이 물에 잠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충주댐이 생긴 이후로 한강이 범람하여 서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충주댐 수문을 덜 열어 물난리가 더 심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군대에 가 있던 1980연대 말 1990년대 초에는 TV뉴스를 통해 물에 잠긴 고향마을을 보기도 했다. 벌건 강물이 불어나면 동네 사람들은 밤새 잠을 설치며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몇 개 남았는지 세곤 했다. 세찬 강물에 큰 나무들이 뿌리째 둥둥 떠내려 왔고, 어느 해에는 큰 돼지가 산채로 떠내려 오기도 했다. 강변에서 불도저로 무슨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쓰던 석유드럼통이 떠내려 와서 동네 형들 중 한 명이 몸에 밧줄을 묶고 다리에서 뛰어내려, 그 드럼통을 끌어안고 다른 형들이 밧줄을 당겨 그것을 건져내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세차게 내리는 장맛비와 거센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그냥 모든 게 다 떠내려갔으면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거침없이 흐르는 물결을 보면서 왠지 모를 후련함으로 온몸을 떨기도 했었다. 물에 잠겨가는 논밭을 걱정하는 어른들과 달리 어린 우리들은 무척 신이 났었다. 사람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와 강둑에 서 있고, 삼삼오오 모여 술렁대는 마을 분위기가 우리를 들뜨게 했다. 피난 짐을 꾸려 가까운 초등학교 체육관에 마을 사람들과 모여서, 함께 북적대는 게 좋았다. 어른들도 어찌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해마다 겪는 일이라서 익숙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마냥 비관하기보다는 끼리끼리 어울려 술추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피난을 가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비가 그치고 물은 금세 빠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큰 피해는 없었고, 사소한 피해는 서로서로 돕고 힘을 모아 복구를 하고, 다시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을 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함께 고난을 겪으며 더 굳건해지고, 관계를 단단하게 형성해갔다. 태풍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듯, 장마도 모든 걸 다 휩쓸어 간 건 아니었다. 장마를 겪으며 사람들은 함께 고난을 이기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 또 살아남고 살아갔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고향에서 장마철을 보내고 있지만, 그때와 달리 그 많은 이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서 장마를 겪고 있는 듯해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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