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깜짝 놀랐다. 대문 앞 텃밭에 물 주기를 막 끝내고 뒷정리를 하던 참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둔탁한 소리에 전동차가 언덕을 내려오려니 했다. 몸이 불편하신 이웃집 아주머니가 산책을 나오셨나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커다란 덩치가 휙 하고 지나간다. 말로만 듣던 고라니다. 곧이어 백구가 바짝 따라붙어 뒤를 쫓는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제 몸집보다 큰 고라니를 쫓는 백구가 오늘따라 듬직하다. 가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백구다.

우리 텃밭은 동네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있어 동물들의 출입이 잦은 편이다. 고라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짐승들의 텃밭 출입을 막아야겠기에 그물 울타리를 쳤다. 내심 든든하게 여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덩치가 제법 있는 백구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밭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도 나도 얼음이 되었다. 한겨울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꼬랑지를 바짝 쳐들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었다. 나도 질세라 뚫어져라 쳐다보면 먼저 슬슬 피했던 그였다. 이미 갖가지 모종을 심어놓은 터라 발로 빠댈까 노심초사 불안했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다가,

“너 여길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밭으로만 들어가지 마라. 저기 울타리를 쳤으니까 밖으로만 다녀야 해.” 알아듣거나 말거나 내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백구는 한참을 서서 내 얘기를 듣더니 밭고랑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고! 이쪽으로 가라니까!” 무슨 소용이랴. 백구는 알 듯 모를 듯 힐끔힐끔 나를 돌아보더니 제 갈 길을 간다. 그럼 그렇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그랬던 백구였다. 동네에서는 들개라는 얘기도 있고 어느 공장에서 키우는 개가 풀려서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어떤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번번이 맞닥뜨려야 하는 나로서는 그를 내쳐서 감정을 상하게 하기보다 그냥 한 동네 같이 사는 이웃이라 여기기로 했다. 평소 애완견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번은 쓰레기를 버리려 동네 어귀로 향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백구가 겅중거리며 내게 달려들 듯 숨을 헐떡이는 것이 아닌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겁이 나서 애써 외면하는데 백구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끝까지 따라온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선한 눈매에 꼬리까지 흔든다. 아하, 나를 알아보겠다는 뜻이구나.

맞다. 백구는 애당초 내게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얕보지도 않았다. 내게 해코지 한 적도 없고 농작물을 그르치며 다닌 적도 없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공연히 두려워하고 경계한 건 내 쪽이었다. 백구에게 미안했다.

고라니와 백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이제 고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의 텃밭을 저토록 필사적으로 지켜주는 백구가 있으니 말이다. 말해 무엇하랴. 텃밭 주인은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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