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주의 신한승도, 서울의 도기현도, 부산의 이용복도 모두 송덕기 옹에게 와서 배우고 자문을 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결국 현대 태껸의 시조는 송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덕기라는 한 사람이 이 거대한 전통문화의 흐름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반면 이와 대조되는 것이 격구입니다. 고려 때부터 사내들 사이에서 인기 많았던 종목이고, 이것이 구한말까지 이어져 송덕기는 대한제국 군인 시절에 격구를 했던 사람입니다.

이 점을 주변 사람에게 늘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격구는 끊어졌습니다. 오늘날 말타는 동호인들이 격구를 하며 단체도 여럿 생겼고, 드라마나 영화에 이들이 출연하여 옛날의 격구 영상을 찍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격구는 창작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들에게 송덕기 옹이 자문해주고 이러저러하라고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당연히 전통이 ‘계승’된 것입니다. ‘단절’과 ‘계승’은 이처럼 한 끗 차이입니다. 격구는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전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것을 결정한 것이 바로 송덕기 옹입니다.

서울 편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서울 편사에 대해서는 ‘조선의 궁술’날 누가 보아도 다 알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해놓았습니다. 궁술책에서 사법보다 오히려 편사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길고 풍부하다는 것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의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쇠퇴해가는 편사의 어두운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의 궁술’에 묘사된 서울 편사가 지금은 끊어졌습니다. 성낙인 옹이 입을 열기 전인 2000년까지 말이죠. 2001년 1월 6일, 청주 우암정에서 온깍지궁사회 창립 모임이 열렸고, 그다음 날 시범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성낙인 옹이 우암정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때 서울 편사할 때의 형식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무겁에 나간 고전을 향해서 성낙인 옹이 “정순 나간다!”고 했고, 무겁의 깃발이 돌아가자 한량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화살이 과녁을 맞고 튀자 성낙인 옹의 입에서 획창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석희 벼언~!” 한국전쟁과 함께 멈추어버린 서울 편사의 획창이 청주의 한 활터에 메아리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온깍지궁사회에서는 대회를 편사 형식으로 치렀고, 그 흐름은 지금도 온깍지동문회 모임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온깍지편사회’를 구성하여 매년 ‘온깍지 편사’를 치릅니다. 온깍지 편사는 서울 터편사의 형식으로 치르는 편사를 말합니다. ‘조선의 궁술’에 묘사된 편사는 아주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정끼리 벌이는 터편사를 계승하려고 ‘온깍지 편사’라는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2014년에 제가 충북예술고에 근무하게 되면서 국악 하는 제자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활터의 획창 문화를 소개하고 온깍지 편사 때 기생획창을 붙여보았습니다. 삼삼했습니다. 이로써 온깍지 편사는 소리까지 갖춘 서울 터편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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