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달, 지인 부부가 찾아왔다.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던 50대 후반의 남편은 얼마 전 명예퇴직을 강요당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떠날 위기에 처한 남편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30년 가까이 몸담은 직장에서 배신을 당한 기분도 들었다. 결혼할 나이의 큰 딸과 아직 고등학생인 둘째 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딸들의 결혼과 대학을 걱정하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더욱 위축되고 초라해졌다.

한편으로는 가족들이 자신을 돈 버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남자들은 퇴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달고 산다. 언젠가 퇴직할 것을 알지만, 가능한 늦추고 싶은 마음에 인사발령은 늘 떨리고 두렵다. 무거운 바윗덩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것 같고, 그 무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간다.

일반적으로 남자에게 직장은 힘이고 자존심이다. 연봉이 많을수록 힘이 더 센 것처럼 느끼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일 세상’에 빠져 들면서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와 자신의 마음을 챙기지 못한다. 일에는 성공하지만 관계와 자신의 마음 챙기기에는 실패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퇴직을 맞이하게 되면, 그것이 뜻밖이든 예상되었든,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것 같다. 그동안 마음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을 해온 탓에 집에서도 설 자리가 없고 어색하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몸으로도 나타난다. 부부간의 성관계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남자로서의 자존심은 더욱 상하게 된다. 가장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가치가 없어진 것 같은 무력감이 든다. 도대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나는 가정에서 어떤 존재란 말인가? 뒤늦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 위기의 시기에 찾아오는 것이 술과 외도의 문제다. 술을 마셔야 어깨위에 놓인 바위가 덜 무겁게 느껴진다. 아내와는 다르게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때론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여성에게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죄를 짓고 만다. 판사, 검사, 교수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의 남자들이 의외로 이성적이지 못한 성(性) 문제에 휩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하는 사람은 아내이다. 중년 남자는 자녀들의 아버지 이전에, 한 여자의 남자로서의 상실감이 가장 큰 상처이기에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다. 2014~2015년에 걸쳐 필자도 해고와 중징계의 위기가 있었다.

부당한 근무평가와 지역의 환경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 필자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아내의 말 한마디였다. “그깟 직장 때려 쳐요! 당신은 잘못이 없으니 굽히지 말고 당당히 맞서요! 돈은 내가 벌테니 걱정 말아요.” 무모하고 현실성 없는 아내의 말이었지만, 필자에게는 그 누구의 위로보다 큰 힘이 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위기의 남자를 돕는 것은 그의 아내이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 중년의 남자들도 미리 퇴직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자신의 마음 챙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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