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천상 낙원이 지상으로 내려앉는다면 이런 풍경일 것이다.

수목원에서는 걷는 내내 달달한 향이 났다. 이곳에는 학창 때 거닐던 교정도 있었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파라다이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은 천리포 수목원,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푸른 눈을 가진 민 병갈 박사는 1962년에 부지를 매입하고 척박한 땅에 수목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18만평에 1만7천분류군의 전 세계적인 수목을 식재하여 봄에는 목련, 만병초, 튤립, 여름이면 수국, 가시연꽃, 상사화, 장미, 가을이 오면 화살나무, 억새, 단풍나무, 눈이 오면 호랑가시나무, 동백과 복수초, 설강화가 화려하게 수놓는다.

1979년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정원에 대해서 결코 만족이 없었다. 그칠 줄 모르는 집념으로 생태학을 연구하고 지식의 지평을 넓혀가며 해충과 싸우며 식물에 귀를 기울이고 때를 맞춰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철저한 관리와 계획으로 가꾸어 나갔었다.

57년간 고난과 시련을 하늘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전 세계 나무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이루어 놓은 지금의 수목원은 다니엘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를, 존 버니언이‘ 천로역정’을 감옥에서 탄생시킨 것과 같이,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나서도 위대한 곡을 내고, 존 밀턴이 두 눈을 실명한 후 ‘실낙원’을 탄생시킨 것처럼 그는 우리나라에 녹화사업과 생태학 학술연구에 크게 기여 했다는 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어도 이곳은 매순간 성장하며 변화하고 있었다.

임산 민 병갈 박사의 흉상이 세워진 추모공원 앞에 섰다. 2002년 그가 사망하자 ‘내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말라, 묘 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뜻을 받들어 태산목 목련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모셨다.

“나는 호랑가시나무와 결혼해 목련을 낳았지” 고향에서 가져온 가시 목련을 심어놓고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위로를 받으며 평생을 비혼으로 지냈다.

300년 뒤 한국의 후손을 위해 준비하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신 숭고한 정신에 절로 고개를 숙여진다.

꽃과 나무를 사랑하고 무시로 싹을 틔우는 새로운 생명에 기쁨을 갖고, 자라나는 과정을 기다리며 인애(仁愛)의 소중함을 남기고 간 민 병갈 박사를 생각하며 나의 60년 인생의 정원을 들여다본다.

내 안에도 이 같은 안식의 정원을 반복적으로 동경해 왔었다.

빈 땅에 집을 짓고 가정이라는 씨앗을 심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꽃을 심고 싶어 하길 바랬다. 그러나 가정에 대해서는 결코 교만할 수 없었다. 나만의 자만에 빠져 때로는 피지 못할 꽃을 키우고, 향기가 없는 열매를 맺고, 숲이 없는 잡초만 무성한 정원을 가꾸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정원에 땀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나서야 팀파니의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선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기본적 리듬만 타는 미완성된 정원을 가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매시간 정성을 다하여 완성된 정원을 향해 내 삶의 지표를 채워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원은 삶의 바탕으로 모든 이들이 꿈꾸는 낙원이 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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