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을 두루 만나면서 들은 말 중에, 옛날에는 폐결핵에 걸리면 활쏘기를 권했다고 합니다. 대전 대동정의 백남진 접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고, 다른 여러 활터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성낙인 옹도 어릴 적 폐결핵이 걸려서 집궁을 했다고 합니다. 경기중학교 때였는데, 그때는 결핵약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별다른 치료법이 없이, 잘 먹고 충분히 쉬면서 운동을 해서 저절로 몸이 병을 이기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활쏘기를 추천했다는 것인데, 활쏘기가 결핵균을 이길 만큼 강력하고 효과 좋은 운동이었다는 뜻입니다. 성 옹은 경기중학교 휴학 중이던 1941년에 아버지의 활로 집궁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폐결핵을 고칩니다.

성 옹은 1970년대 들어 활을 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황학정을 만들다시피 한 이력이 있고, 성 씨 집안에서 활쏘기가 의미하는 바를 익히 알기 때문에 사원의 의무인 회비 납부는 꼬박꼬박했습니다. 언젠가는 활터에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마음속에 늘 품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중풍이 온 그 무렵에 황학정에서 회원정리를 했고, 오래 활터에 안 나오는 사원을 휴정 처리함으로써 성 옹은 결국 활터에서 제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꽤 많이 넋두리처럼 말씀하셨고, 우리는 묵묵히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활터가 예전 같지 않게 변한 것을 우리도 너무 잘 아는 터라 남의 활터에서 하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황학정에서는 그럴 만한 작은 말썽거리가 일어난 때였습니다.

성 옹은 자신이 더는 활을 쏠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닫고는 저를 불러 당신의 활과 화살을 넘겨주셨습니다. 자신의 활 인생을 정리한 것입니다. 동행한 성순경 접장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궁시를 받았는데, 이렇게 된 저간의 과정에 대해 성순경 접장은 이후에도 내내 성 옹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저에게 몇 차례 말했습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 자신이 황학정에 집궁회갑 얘기를 해서 성 옹이 중풍 맞는 빌미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순경 접장에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순경 접장이 아니라도 같은 정 사원으로서 누구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2011년 11월 25일에 입산하신 성낙인 옹의 빈소에 찾아갔습니다.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유족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제가 쓰던 각궁을 한 자루 드렸습니다. 한량이 저승에 갈 때는 자신이 쓰던 활을 관에 넣어드리는 법이라며 사정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저에게 궁시를 넘긴 성 옹에게는 활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제가 한 장 가져간 것입니다. 상주인 성재경 선생은 그 각궁을 제상 옆에 올려두었다가 관과 함께 묻었습니다.

활로 맺은 인연은 활로 이어집니다. 한량이 주고받는 활 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오랜 전통이 살아 숨 쉽니다. 내게 오고 내게서 가는 활에서 저는 천년 묵은 그윽한 향기를 느끼며, 내가 그런 전통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가슴 벅찹니다.

이런 전통의 향기가 아니었다면 저는 2003년 정간을 도끼로 찍은 그 날로 활을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활쏘기를 가르치는 교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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