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1994년에 서울 활터 황학정에서 ‘국궁1번지’라는 책을 냅니다. 김집 접장이 총무를 맡으면서, ‘조선의 궁술’ 이후 처음으로 책다운 책이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제5집까지 매년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집의 노력은 ‘국궁교본’과 ‘황학정백년사’로 이어지면서 현대 활쏘기 기록의 한 획을 긋습니다.

이 책 국궁1번지에 ‘8·15 해방 직후의 황학정’이라는 글이 실립니다. 해방 전후의 황학정 생활을 회고한 글로 글쓴이는 성낙인입니다. 그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를 보고 제가 수소문하여 연락했고, 결국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찾아가서 녹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대담록으로 나온 책이 ‘이야기 활 풍속사’(2000)입니다.

성낙인 옹은 2001년에 집궁회갑을 맞습니다. 이 사실을 안 온깍지궁사회에서는 2대에 걸친 경사를 그냥 둘 수 없어 창녕 모임에 성 옹을 초청했습니다. 그날 간단한 기념식을 하고, 집궁회갑 기념패를 드리는 행사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남 창녕은 7순 노인이 오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습니다. 결국 올 수 없다는 답을 들었는데, 며칠 뒤 성 옹이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 기념패를 택배로 보내드렸습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날 낮에 황학정에서 겪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저녁에 중풍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황학정 사원 중에 성순경 접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온깍지궁사회 회원이었고, 경남 창녕 모임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서 인사를 해왔기에 창녕에서 있을 집궁회갑 기념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황학정 사원으로서 살펴보니, 정작 본정에서는 이런 사실조차 모르는데, 온깍지궁사회에서 행사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황학정 김경원 사범에게 귀띔했고, 김 사범은 사두에게 건의해 간단하게라도 기념식을 해야 한다는 데까지 일이 진전된 것입니다. 우리는 잘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서울 성 옹 댁으로 인사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의 상황을 말씀하시는데, 특유의 조근조근한 말투였지만 사정으로 보아 엔간히 열 받은 듯했습니다. 저녁때 올라오라기에 시간에 맞춰 활터에 갔답니다. 그랬더니 밥그릇만한 케이크를 하나 놓고 고문이라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고 집궁회갑의 주인공인 자신을 마주 앉히더니, 학생부에 끌려간 학생 대하듯이 일장 훈시를 하더랍니다. 김경원 사범이 민망한지 말려서 길게 늘어질 뻔한 ‘축사’가 끝나고 서너 명이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박수 치고, 행사가 끝났는데, 결국 그날 밤에 댁에서 풍을 맞아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것이었습니다.

풍 맞고 처음 뵈었을 때 보니 팔과 다리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걱정하는 성 옹께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성 선생님, 활 쏜 사람들은 잘 안 죽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나을 겁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 말이 그때 아주 많이 위안이 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2001년에 중풍이 왔는데도 2011년에 입산을 했으니, 그래도 84세까지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중풍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오래 사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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