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교육 100년 현장을 가다

충북지역에서 개교 후 100년을 넘긴 학교는 충주 교현초, 청주 청남초, 옥천 청산초, 진천 상산초 등 4곳. 길게는 109년이 된 학교도 있다. 한결같이 일제 강점기, 6·25 한국전쟁 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아직도 굳건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충북교육의 산 증인인 셈이다. 충청매일는 창간 6주년을 맞아 이 학교들의 100년 역사를 되짚어 봤다.

충주 교현초등학교

개화냐 쇄국이냐를 두고 한창 우리나라가 혼란스러웠던 1890년대.

이 격동의 와중인 1894년 충북 최고(最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충주 교현초의 전신 충주공립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충청북도지(忠淸北道誌)에 ‘충주소학교는 1895년 7월19일 칙령 145호로 공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학교로 충주공립소학교라 칭하고 헌병대 관사가 있었던 위치에서 한문만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내각 기록국 관보과에서 건양원년(建陽元年·1896년) 1월31일(금요일)자로 발행한 관보 236호에는 ‘내각은 1월29일자로 황한동(黃漢東) 교원을 서울의 관립소학교교원(官立小學校敎員) 2명과 함께 판임관육등(判任官六等)의 직급으로 충주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임명한다’고 쓰여져 있다.

충주공립소학교는 이후 20년이 지난 1906년 9월1일 보통학교령 실시로 인해 4년제인 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됐다.

1909년 3월28일 마침내 보통학교 남자 1회 졸업생이 배출되고 동창회가 조직됐다.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일한병탄(1910년 8월29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식 교육이 실시된다. 물론 교장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은 1916년 4월부터 여학생 입학을 허가했고 4년 후 여자 1회 졸업생이 탄생했다.

1929년엔 학생들이 양계조합을 만들어 직접 기른 닭을 시장에 팔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합은 1935년 해산했다.

교현초가 현재 위치인 교현동 339에 자리잡은 것은 1932년 9월1일.

이듬해인 1933년에 학생수가 1천명을 돌파했다. 당시 학교 규모는 18개 학급에 교직원 22명, 학생 1천32명이었다.

1938년에 최초로 교현 명칭이 사용된 충주 교현공립 고등심상학교로 개명됐고 1942년에는 국민학교령 실시로 충주 교현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19일 학적부 기록 상 이 학교 여학생 6명이 정신대에 징발되는 치욕을 겪었다.

해방 후 민족교육이 실시됐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로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 해 7월 북한군이 충주를 점령한 후 본관과 별관이 일부 파괴된 것.

그 해 10월 전시교육체제에 들어갔으나 1951년 4월7일 본관이 유엔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이런 과정에서도 당시 황갑봉 교감과 황순철씨 부자의 기지로 교현초 학적부가 한 권의 유실도 없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996년 9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치른 교현초는 현재까지 96회에 걸쳐 졸업생 2만6천여 명을 배출했다.

 

청주 청남초등학교

청주지역 최초 근대학교로 꼽히는 청남초.

청남초는 초창기 사학이었다.

개화의 물결이 넘실거렸던 1904년 11월1일 개화사상을 품고 있던 방흥근 선생, 김태희 선생, 김원배 선생 등 우국지사가 뜻을 모아 방흥근 선생의 사택에서 15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사립 광남학교(光南學校)가 청남초의 뿌리다.

광남학교는 1908년 8월1일 청남학교로 개명했고 그 해 11월1일부터 민노아(閔老雅) 선교사(미국)가 대한제국 학부대신의 허가를 받아 경영을 맡았다.

청남학교는 1921년 6년제로 승격됐고 2년 후인 1923년 4월부터 민노아 선교사가 설립한 청신여학교를 흡수, 제일교회에 있었던 망선루를 교사로 사용했다.

이에 따라 1922년과 1923년 두 해 동안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 망선루는 1999년 10월 철거돼 2000년 12월 청주 중앙공원에 복원됐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 후 같은 해 11월 청주에서 수 개월 동안 피신하며 난이 평정되자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의 명단을 적은 방을 망선루에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건물은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건축물이다.

기독교학교인 청남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36년 10월12일부터 9일 간 휴교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에는 운영난으로 교사가 없어 야외수업을 해야만 했다.

1942년 4월1일 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127에 새 둥지를 튼 청남학교는 1945년 4월1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공립 성남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지만 광복으로 6개월 만에 청남국민학교 이름을 되찾았다.

청남학교는 6·25동란 중에도 후관을 신축하는 등 꾸준히 발전해 1885년까지 교사가 계속 증축됐으며 1990년에 본관 3층을 태양열 시스템으로 교체했다.

청남초는 1996년 정부의 ‘국민학교’ 개명 방침에 따라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청남초는 지난해 11월 대규모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기념식에서 일제치하 또는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동문들에게 명예졸업장이 수여됐다.

올해까지 95회에 걸쳐 1만7천여 명이 청남초를 졸업했다.

 

옥천 청산초등학교

1905년 사립으로 충북 지역에서 세 번째로 출발한 청산초등학교.

당시 학교 이름은 청산사립신명학교다.

1911년 일본의 공립보통학교 설립 방침에 따라 개교 7년째인 1912년 4월1일 청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교육을 이어갔다.

개교 10년 만인 1915년 3월23일 처음으로 18명이 졸업했다.

청산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은 25년 간 사용되다가 1938년 4월1일로 청산공립심상소학교로 다시 이름이 바뀐 뒤 꼭 3년 만인 1941년 4월1일 청산국민학교로 개칭됐다.

청산초도 충주 교현초, 진천 상산초 등과 마찬가지로 6·25전쟁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산초는 6·25전쟁 발발 한 달도 되지 않아 교실이 전소돼 수업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일부 교사가 복구돼 석 달 만인 그 해 10월12일부터 수업이 재개됐다.

청산초는 1963년엔 교가를 만들었으며 1965년 본교 26학급, 분교 6학급 등 32학급으로 편성돼 재적생이 2천226명에 달하는 학교로 급성장했다.

농촌인구 감소로 인해 현재 9학급에 전교생이 200여 명인 것과 비교하면 10배가 넘는 규모다.

청산초는 5공화국 초기인 1980년 3월5일 병설유치원을 설립, 개원했다.

병설유치원은 1981년 2월19일 원아 40명이 졸업식을 갖고 당시 상급학교인 청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병설유치원은 올해까지 25회에 걸쳐 모두 87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속적인 인구감소로 취학아동 또한 줄어들어 청산초는 1995년 3월1일자로 예곡, 대월 등 2개 분교장을 본교에 통합했다.

이후 이듬해인 1996년 3월1일 지금의 청산초등학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99년에 인근 청동초등학교를 흡수한 청산초는 2000년 10월11일 시청각실을 준공했다.

올 2월17일 27명이 90회 졸업식을 치른 청산초는 이날 매우 뜻깊은 행사를 마련했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이름이 적힌 졸업장을 받은 동문 105명이 백발의 나이에 한국 이름으로 된 새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이 학교 총동문회가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로 추진한 ‘창씨개명 학적부 바로잡기 운동’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청산초는 1966년 51회 317명을 정점으로 졸업생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충북 남부권 교육의 뿌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동문의 자랑이다.

 

진천 상산초등학교

구한말인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되자 독립운동가 이상직 선생은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구미 선진국가의 교육방법을 도입해 문명인을 양성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 그 해 고향인 진천으로 내려와 상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선생은 자택(당시 진천읍 읍내리 381) 객실을 개조해 교실을 만들고 사재를 들여 교육시설을 마련한 다음에 학생을 모집하고 교사를 초빙, 진천에 처음으로 근대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개교 당시 학생은 이철해·주익환 등 4명이었고 교육내용은 한문 이외에 국어·산수·지리·역사·법학·체조·가창 등이었다.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교실이 협소해져 향교의 명륜당 등을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했으며 학교 이름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친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문명학교’라고 불리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교 4년째인 1909년에 당시 이택응 진천군수가 향교 수입인 좁쌀 40여 석과 옛날 현아 터를 학교부지로 제공, 교사를 신축하게 된다.

그러나 1910년 강제로 국권을 빼앗은 일본이 사립학교가 배일사상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전국 각처에 공립학교를 세우면서 사립으로서 명맥은 이 때 끊겼다.

일본이 1911년 6월3일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내 그 해 9월 문명학교를 폐교하고 10월2일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것.

1913년 1월6일 현재의 삼수초 부지에 교사를 건축, 이전한 후 3월25일 첫 공립학교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1941년 4월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했다.

당시 교사가 노후하고 학생 수 급증으로 교육활동에 어려움을 겪자 1868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호신 선생이 사재를 털어 새 터를 마련해준다.

이호신 선생의 희사로 교실 14개 등을 갖춘 철근 콘크리트 교사를 짓게 된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전까지 33회 졸업식이 치러졌다.

올 2월 93회 졸업식으로 모두 1만5천303명이 상산초를 거쳐갔다.

상산초는 지난달 3일 64회 동창회가 주관해 개교 100주년 기념 동문체육대회를 성대하게 치렀다.

동문회는 이날 학교 사료를 영구보존하기 위한 타임캡슐을 100주년 기념 상징탑 밑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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