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뉘엿뉘엿,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이면 미호천을 향하여 핸들을 돌린다. 매일 만나는 길이지만 하늘빛은 언제나 다르다. 오늘은 뭉게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 카메라 화각 맞추기에 그만이다.

이른 봄 천변은 목가적이다. 수십 리 하천을 따라 형성된 논과 밭에서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주렁주렁 열리고, 가지마다 방울토마토가 탱글탱글 익어가고 있다. 뚝방 길로 이어지는 이 길은 인도가 따로 없어 걷기에 불편하지만 군데군데 쉼터가 있어 가끔 차를 세우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빠지기도 한다. 서두름 없이 흘러가는 들녘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허허로운 천변은 버드나무와 여러해살이풀과 갈대가 군락을 이뤄 거대한 습지로 형성되어 있다. 가을에 한껏 매력을 뽐내던 갈대는 이제 봄바람을 맞으며 다시 생기를 입는다.

문암생태공원 근처와 미호천 합수머리 부근으로 시야를 넓히면 손에 잡힐 듯이 백로와 왜가리, 청둥오리를 볼 수 있다. 철새가 찾아드는 계절이 오면 천변에는 작은 혁명이 일어난다. 눈에 다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야생조류가 둥지를 틀고 무리생활을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종이 자연스럽게 활동하며 상생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을 통해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에 이른다.

천변 풍경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오목하게 패인 왕 버드나무 몸통 안에서 실 버드나무가 뿌리를 박고 기생하고 있는 모습이다. 혹처럼 거추장스러울 법도 하건만 왕 버드나무는 품에 안고서도 강물을 맑게 하고 물고기와 새와 풀을 살리고 있다.

뚝방 길에는 다리쉼을 할 수 있는 돌머리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가끔 그루터기와 같은 돌머리에 앉아 오래된 이별을 꺼내어 보고 기약 없는 안부를 묻는다. 말 없는 질문은 대답도 말없이 들려준다. 이럴 때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왕 버드나무가 나를 다독거린다.

푸근함과 정겨움을 폴폴 내뿜는 천변길에서 멋진 노을을 만났다. 붉은 해가 수만 리 구중 천하에 빨간 알사탕처럼 동동 떠 있다. 입에 넣고 굴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사탕처럼 작게 보이지만 해는 세상을 품고 온 세상을 밝힌다. 이렇게 노을이 지는 날에는 작은 바람에도 마음의 물결이 인다. 해는 순식간에 서녘 하늘로 자취를 감춘다. 잔 노을이 지는 천변은 만고풍상을 겪었어도 고졸한 풍경으로 죽은 듯 살아있다.

천체 사진 작가가 말했다. ‘인간은 우주의 먼지이다’라고, 세상의 중심인 줄 알고 착각했던 인간은 결국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일 뿐이다.

받는 것은 부채이고 주는 것은 ‘기쁨’이라는 진리 앞에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속물적인 나의 반쪽 세상이 부끄러워진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반쪽 세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세상이었다. 보이지 않는 나의 반쪽 세상은 과연 어디일까, 사상, 이념, 윤리, 믿음, 자유, 이 세상을 멀리 두고 살아왔다. 이제야 만난 반쪽 세상은 화려한 꽃 한 송이 없어도 좋다. 푸르지 않아도 좋다. 나눔으로 비움으로 제 몫을 다하는 나무처럼 의연하게 살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피안의 세계는 아니어도 이 천변의 왕 버드나무처럼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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