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684년 무측천은 본래 당(唐)나라 태종의 후궁이었다. 기교가 있어 그 아들 고종을 유혹하여 황후에 올랐다. 고종이 죽자 그녀는 정치 전면에 나섰다. 우선 태자인 장남 이현을 폐위시켰다. 다음날 둘째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예종(睿宗)이다. 그녀는 정치적 야심이 아주 강했다. 5년 뒤에 예종을 내쫓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도 당에서 대주(大周)로 바꾸었다.

10년 후에 무측천이 죽고 폐위됐던 이현이 군부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다. 이가 중종이다. 그런데 중종의 부인 위씨 역시 정치적 야심이 강했다. 그녀는 무측천처럼 황제에 오르고자 딸 안락공주와 모의하여 중종을 독살하였다. 이어 자신의 친아들을 소제(少帝)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한 달 후 폐위된 예종의 셋째 아들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군대를 동원해 위황후를 비롯한 위씨를 모조리 죽이고 소제를 퇴위시켰다. 그리고 부친 예종을 재등극시켰다. 이 공로로 이융기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태평공주는 많은 인사권을 쥐게 되었다.

2년 후에 예종은 태자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가 현종(玄宗)이다. 하지만 황제 자리는 권한이 없는 바지사장이었다. 실질적인 권한은 태평공주가 쥐고 있었다. 태평공주 역시 무측천처럼 황제를 꿈꾸었다. 그런데 현종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즉각 권력 쟁탈을 시작했다. 군대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태평공주 편에 선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싸움에서 패한 태평공주는 사약과 유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녀는 결국 자결함으로 막을 내렸다.

현종은 권력을 쟁취하자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황제의 면모를 보였다. 재위 초기에 당나라 재건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우선 구시대 관료들을 강제로 은퇴시켰다. 대신 젊고 유능한 새로운 인재로 충원하였다. 또 군대 권한을 직접 통솔하여 동요를 없게 했다. 이로 인해 티베트·돌궐·거란족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관료와 군대를 평정하자 나라의 기틀이 안정되었다. 40년을 그토록 혼란에 빠뜨렸던 정치 싸움을 끝낸 것이었다. 백성들은 열광했고 당나라는 크게 번영했다. 이후 20년 동안 당나라는 현종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하지만 후반기에 들어 현종은 의외로 관료를 신임하여 재상 이임보에게 전권을 맡기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은 도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미신에 빠져 지냈다. 그러던 중 며느리인 양귀비를 만나 술과 연애로 세월을 보냈다. 이 역시 도사들의 절묘한 계략이었다. 이때 현종에게 총애를 받은 도사들이 수백 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장안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다. 현종은 갈수록 멍청해졌고 나중에는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고 양씨 일족을 대거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녹산이 양국충과 대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세력이 전국을 뒤덮자 양국충은 결국 죽고 양귀비는 자살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현종 역시 황제에서 내려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후 당나라는 다시 정치 싸움에 휩싸였다.

중도이폐(中途而廢)란 일의 시작은 좋았으나 중간에 미신이나 환락에 빠져 하던 일을 그만둔다는 뜻이다. 미신에 빠지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연인과 친구를 잃는다. 그런 사람이 국정을 맡는다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