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성문영 공은 1944년에 집궁회갑을 맞습니다. 여기서 60을 빼면 그의 집궁년이 됩니다. 1884년입니다. 이때 집궁을 하여 무과에 응시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과에서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아갑니다. 벼슬은 정3품 통정대부에 이르는데,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새롭게 출발할 때 그 동안 세운 공적으로 6등 훈작을 받습니다. 정식 명칭은 ‘정삼품훈육등통정대부중추원의관’입니다.

중추원은, 특정한 직책이 없는 대신들이 소속된 기관입니다. 고려 말에 생긴 조직인데,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왕 측근의 인사들이 잠시 직책을 내려놓고 쉴 때 소속되던 기관입니다. 이들은 왕명만 있으면 어느 직책이든 임명되는 위치여서 이들이 직함은 없지만 왕실의 실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 공도 이곳 소속이었고, 궁내부에서 왕실의 내부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아마도 성 공의 집안이 고종이 총애하던 엄비와 사돈지간인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습니다.(‘국궁논문집1’)

성낙인 옹이 선친 성문영 공을 회고하며 쓴 글 중에 성 공이 호남철도부설권을 따낸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우던 내용인데,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 곁의 사람한테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냈는데, 실제로 성 공의 유품 중에 호남철도부설권과 관련된 서류가 한 장 있었습니다. 호남철도부설권을 허가한 총독부 담당자는 이즈미(亥角仲藏)였는데, 이 큰 사업을 조선인에게 넘겼다고 일본인 사업가들이 항의하여 담당자 이즈미 국장이 곤란을 겪게 되자, 성 공이 스스로 이 허가권을 반납하였고,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오래도록 좋은 친분을 이어갔다고 성낙인 옹이 회고했는데, 그것이 사실임이 이 한 장 서류로 인하여 확인된 셈입니다.

특이한 것은, 성 공이 궁내부 소속으로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면서도,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나중에는 실업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황학정 사계를 보면 사계 총재가 민영환으로 나옵니다. 민영환은 한일강제합병이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으로, 고종이 가장 총애하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리고 성 공은 그의 곁에서 늘 함께 움직였던 사람이었는데, 성 공 스스로 작성한 이력서를 보면 정치경력은 거의 없고 실업계에 중요한 이력들이 가득합니다.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상공회의소, 한성은행(조흥은행 전신), 조선산업은행 같은 단체에서 중요 직책을 맡습니다. 게다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울 지역의 국채보상운동 상무원이 되는데, 유품 중에는 그 임명장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물론 활 관련 유품이 아니어서, 저는 그것을 성 씨 가문에 돌려주었습니다.

당시 급변하는 정국과 성문영 공의 행적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를 보면, 성 공은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황실에서 추진하는 여러 사업에 관여하여 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이에 민영환이라는 큰 인물이 있었고, 그의 그늘에서 돕는 여러 활동을 하다가 그의 자결과 함께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정치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선 듯합니다. 이후 성 공이 활쏘기 활동에 전념하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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