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2013년 성재경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선친 성낙인 옹의 활 관련 유품을 줄 터이니 한 번 찾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서울 사직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종묘 담장에서 몇십 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옛집이었습니다. 2년만에 다시 방문한 그 집에서 놀라운 활 자료들을 한 더미 안고 돌아왔습니다. 모두 근대 활쏘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이었습니다. 그 직후 바로 온깍지궁사회 사계 모임을 열었고, 사계원 7명이 달려들어 1박 2일 동안 꼬박 밤샘하며 자료를 정리했고, 그 해에 국궁문화연구회와 공동으로 충남대에서 세미나를 열었으며, 그 과정을 모두 정리하여 ‘국궁논문집’ 제8집을 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은 실시간에 가깝게 즉시 온깍지궁사회 카페를 통해 공개되었고, 그때 정리한 자료들은 디지털 국궁신문(운영자 이건호)에 한 동안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베일에 가린 근대 활쏘기의 모습이 만천하에 소개되는 소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1993년 집궁 후, 아주 간단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과녁의 크기는 왜 저 크기며, 과녁의 모양은 왜 저 모양이냐? 이 질문에 대해 활터에 이렇다고 답을 해주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황당한 상황 앞에서 저는 호기심을 채워줄 사람들을 찾았고, 1996년 겨울에 처음으로 서울 황학정으로 성낙인 옹을 만나러 갔습니다. 당시 ‘국궁1번지’라는 황학정의 잡지에 성 옹의 회고 글이 실려 그 분을 뵈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전화를 수소문하여 어렵게 약속을 잡은 것입니다. 이날 저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많은 분을 만났지만, 의견이 구구 각색이었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정리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지러운 상황을 성 옹이 깔끔하게 정리해준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성낙인은 조선궁술연구회장 성문영 공이 환갑이 거의 다 되어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준 활로 1941년 7월에 집궁했고, 2001년에 집궁회갑을 맞았습니다. 1960년대 말에 생계 문제로 홀연히 활터를 떠난 것입니다. 활터는 1970년대 들어 무서운 속도로 변화를 일으켰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 변화의 기간에 활터를 떠나 있어서, 오히려 옛날의 활터 모습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궁술’을 직접 쓴 당사자의 아들이고, 그에게서 활을 배운 분이었습니다. ‘조선의 궁술’의 화신이 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전화를 드리는 일이 많아졌고, 찾아뵙는 경우가 늘어갔습니다.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했고, 1년에 2~3차례씩 꼭 찾아뵈었습니다. 댁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지하철 종로 3가 역 지하 다방 ‘지중해’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묻다가 돌아오는 방식이었습니다. 근대 활 풍속에 대한 궁금증이 거의 다 해결되었다 싶을 때 성 옹에게 갑작스러운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2011년 입산(활터에서 죽음을 표현하는 말) 1달 전에 찾아뵈었을 때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여 중국집으로 시켜 저와 류근원 교두와 함께 셋이서 먹었습니다.

2년 뒤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성 옹의 아들 성재경 선생이 저에게 연락하신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조부 성문영 공의 유품이 많았는데, 성 공은 근대사의 여러 분야에서 ‘최초’의 발자취를 남기신 분임을 그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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