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한국 체육사를 보면 연구자들은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시작을 1906년으로 잡습니다. 그 무렵에 각종 구락부와 체육회가 나타나면서 ‘근대’ 체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대한체육구락부, 황성기독교청년회운동부, 서계구락부를 포함한 13개 운동 단체가 이 해에 조직되어 활동합니다.(‘국궁논문집8’)

이때를 근대 체육의 출발로 삼는 이유는, 이들의 조직 목적이 명문화되었고, 방향이 스포츠를 지향하는 의도를 드러냈으며, 그것을 수행할 또렷한 조직이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추구하는 스포츠라는 기록과 조직이 존재하여 그것이 일정 기간 이루어져야 근대 체육의 조건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99년에 이에 해당하는 조직이 출범합니다. 앞서 말한 황학정 사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고종 황제의 윤음으로 경희궁에서는 바로 그해에 활터가 만들어지고, 활터를 운영하기 위한 조직인 ‘사계’가 꾸려집니다. 이들이 주먹구구로 한 것이 아니고 경희궁의 담장을 헐어서 활터를 만들고 거기서 일반 백성들도 쏘게 했으며, 체육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담당자를 정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조직 목적과 조직 담당자, 그리고 자세한 행동 세칙까지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것이 ‘황학정 사계 규정’이라는 작은 책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근대 체육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근대 체육의 출발은 1906년이 아니라 1899년이고, 그 종목은 활쏘기입니다. 그리고 1938년 조선일보의 성문영 특별대담에서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근대의 체육 행위나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 동안 그것을 입증할 자료나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체육학계는 물론이고 대한체육회의 부실한 고증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1909년의 동대문 밖 자지동에서 사궁회를 했다는 짤막한 신문 기사 쪼가리를 보고서 근대 활쏘기의 시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기사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활쏘기하며 놀았다는 비난성 기사인데, 그것을 두고 무슨 대단한 근대 체육을 시작한 모임인 양 어느 학자가 묘사했고, 그렇게 쓰인 학자의 논문이 비판 없이 확대 재인용됨으로써 체육계의 확고한 사실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그동안 디지털 국궁신문과 ‘국궁논문집’, 그리고 ‘활쏘기의 나침반’에서 이런 기록이 틀렸다고 꾸준히 지적했는데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제국 외교사의 한 사건에서 비롯된 근대 활쏘기의 한 복판에 성문영 공이 있습니다. 성문영은 이후 1928년 조선궁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그 이듬해 ‘조선의 궁술’이라는 세계사의 걸작이자 우리 활의 경전에 해당하는 책을 만듭니다. 이후 해방되고 한국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47년까지 활쏘기의 대부 노릇을 하며 활쏘기를 근대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성문영 공은, 우리 ‘근대 활쏘기의 아버지’라고 해도 충분한 인물입니다.(‘한국 활의 천년 꿈, 온깍지궁사회’) 그가 아니었다면 근대 활쏘기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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