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문화 산책] 편사에서 보는 근대 활쏘기
[활쏘기 문화 산책] 편사에서 보는 근대 활쏘기
  • 충청매일
  • 승인 2022.01.0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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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인천편사의 기생획창을 가만히 들어보면 호칭이 귀에 쓱 걸립니다. 즉, 편장이 과녁을 맞히면 획창한량이 “김 편장, 관변!”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한량획창을 뒤의 소리꾼들이 받아서 기생획창을 하는데, “김의관 영감, 일시 관중이요오~”하고 길게 소리를 합니다. 의관이란 무엇일까요? 벼슬 이름입니다. 왜 의관일까요? 편사는 옛날 지체 높은 관리 출신들이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취가 남아서 호칭을 성씨 뒤에 ‘의관’이라고 붙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이 벼슬을 내리는 주체인 임금이 없죠. 그래서 인천 편사에서는 인천시궁도협회에서 편장을 서는 사람에게 ‘위관증’을 줍니다. 전에는 기념패처럼 새겨서 주었는데, 2019년에는 족자에 교지처럼 써서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기념패보다는 족자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천에서 편장 서는 사람을 위관이라고 하는 것은, 무관의 각 품계 종5~9품 벼슬이 “○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종9품이 근력도위로 시작해서 정3품 절충장군까지 올라갑니다. 그 위로는 문무의 구별이 없습니다. 아마도 인천의 위관은 지역의 토관들에게 주는 벼슬이었을 것입니다. 토관직은 <도위(徒尉)>라고 하고 정5품 건충(建忠)도위까지 있습니다.(‘국학도감’)

옛날부터 인천에서는 편장을 서면 학생을 면한다고 했습니다. 죽고 나면 고인의 지방을 쓰는데, 거기에 학생이라고 하지 않고 ‘편장누구누구신위’라고 쓴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인천에서는 편장 서는 것을 본인의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아주 큰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편사를 주관할 수 있던 사람은 적어도 무과를 통해 등단한 출신이거나 벼슬을 받은 토관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벼슬아치이거나 벼슬아치 경력이 있는 사람이 편사를 열고 편장을 설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서 대한제국이 망하고 그런 벼슬을 줄 사람이 없으므로 편장으로 나서는 사람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주려고 지역에서 그렇게 여겼고, 편장 당사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후손들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이 해야 할 일을 그 지역의 활쏘기 협회에서 대행한 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오늘날 족자로 편장 임명장을 주는 형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인천 편사를 잘 살펴보면 활쏘기가 조선 시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궁술’에도 나오듯이 편사는 사원들의 사풍을 진작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상무심을 진흥하고 실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모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 자치조직인 사계가 꾸려졌고, 사계를 중심으로 이런 기능을 맡아서 옛 시대를 떠받치는 향촌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1894년 무과 폐지와 함께 <비로 쓸어버린 듯이> 사라졌다고 하여 활터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앞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국가가 활쏘기를 버렸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것도 아닙니다. 활쏘기를 총으로 대신하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렇게 버림받은 활쏘기가 근대 스포츠로 거듭나는 특별한 계기가 우리 근대사에서 포착됩니다. 독일 황태자 하인리히의 방한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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