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당나라 초기에 환관들은 벼슬이 아주 낮았다. 황제와 그 가족을 위해 천한 일과 심부름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현종 때에는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총애하여 중앙 정치에 참여시켰다. 또 환관 양사훈(楊思勛)을 충직한 자라 여겨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게 했다. 숙종 때에는 황제의 호위와 경호를 책임지는 금군의 책임자로 환관 이보국(李輔國)을 임명했다. 이보국은 이후에 당나라의 병권을 쥐고 전횡을 일삼았다.

환관이 정치와 군부에서 실권을 쥐게 되자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자신들이 황제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헌종은 환관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되었고, 대종은 환관 이보국의 도움으로 황제에 올랐다. 목종 이후로는 일곱 황제가 환관에 의하여 옹립되기도 했다. 환관에 의하여 황제가 폐위되거나 옹립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826년 문종은 환관 왕수징(王守澄) 등이 옹립하여 황제에 올랐다. 환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궁녀 3천 명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고, 환관들이 마음대로 임명한 불필요한 관료 1천200여명을 내보냈다. 이에 환관들이 동요하여 문종과 대립하였다. 문종이 결단하여 신하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등을 등용하여 환관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환관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 황제인 문종은 감금되는 수치를 겪었다. 그야말로 황제가 환관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대였다.

이후 환관 구사량(仇士良)은 환관 편에 서지 않은 조정 신하들을 마음대로 체포하고 살해하는 등 권력을 전횡하였다. 20여 년 동안 권력을 쥐면서 두 명의 황제와 한 명의 왕비, 네 명의 재상을 살해했다.

환관이 당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자 뜻있는 신하들은 환관을 깊이 경계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신하들의 대부분은 당파 싸움에 빠져 환관의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당파는 고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이들과 집안 배경으로 낙하산으로 벼슬을 얻은 이들이 각각 당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서로를 극히 경계했는데 고시 출신이 재상에 오르면 낙하산 출신들이 탄핵하여 물러나게 했고, 낙하산 출신이 재상에 오르면 고시 출신들이 탄핵하여 물러나게 했다. 그런데 당파 싸움을 뒤에서 당기고 늘리고 조정한 것은 환관이었다. 그러니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환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관리가 되면 어느 한 당파에 서야 했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환관과 결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 환관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부패하였고 나라는 점점 기울었다. 이후에 외부 세력이 쳐들어와도 당파 싸움과 환관의 전횡으로 당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이란 같은 편끼리 서로 옳으니 그르니 싸우느라 외부의 큰 적에게 망하고 만다는 뜻이다. 개혁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이다. 그 처음은 잘못된 권력 기관을 견제받도록 하여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다. 마침 신년은 선거의 해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개혁의 적임자를 뽑아야 할 것이다.      aio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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