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복순 언니네 은행나무도 이제 하얗게 팔뚝만 드러내고 서 있었다. 거리엔 찬바람이 휴지 나부랭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결석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한 삼일 학교도 못 갈 정도로 독감에 몹시 시달렸다. 평소 같으면 밖에 나가 고무줄놀이며 술래잡기, 지남철 놀이까지 다 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텐데 누워 있는 며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열병이 좀 가라앉자 밖이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은 하얗게 마르고 입안은 쓴맛이 진동했다. 그렇게 누워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아버지께서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비밀스럽게 귓속말을 건네셨다.

“뭐가 제일 먹고 싶은지 말해봐. 아버지가 언니들 모르게 너만 사줄게.”

은밀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건 분명 비밀이었다. 무얼 먹고 싶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니들 모르게 나만’이라는 게 중요했다. 비밀작전은 왠지 신속해야 할 것 같았다. 

“홍시감!”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나가셔서 하얀 봉투에 든 빠알갛고 말랑말랑한 홍시 세 알을 들고 오셨다.

“언니들 오기 전에 어서 먹어.”

아버지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는 우리 둘만의 작전을 수행하는 신중함 그 자체였다. 냉큼 한 입 베어 물었다. 열병으로 메말라 버린 입술에 닿는 상쾌한 차가움, 아기 볼처럼 말랑말랑한 감촉, 얇으레한 살갗에 가려진 보드라운 진홍빛 속살.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물컹 달려와 씹을 것도 없이 목으로 넘어간다. 입안 가득 달큰하다. 하늘이 내린 맛이다. 장마 때면 바닥에 흩어진 도사리에 안타까워했고 늦가을 힘없이 떨어져 푹 터져버린 홍시에 군침을 흘리던 때가 있었다. 괄괄한 더위와 쟁글쟁글한 땡볕을 받아 찬바람 이는 나뭇가지에 끝까지 버티고 남은 홍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완벽한 맛이었다. 차가운 홍시는 온몸을 싸고도는 열감을 모조리 앗아갔다.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곧바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친구들이 놀고 있는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허이구! 홍시가 먹고 싶어 꾀병이었구먼?” 하시는 아버지의 미소 섞인 한마디를 등 뒤에 남긴 채.

그날의 일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간직된 소중한 사건이었다. 5남매 중 가운데 셋째 딸로 자라면서 큰언니처럼 첫째라고 귀여움을 독차지한 적도 없었고 둘째 언니처럼 나도 예뻐해 달라고 시샘을 부릴 줄도 몰랐으며 남동생처럼 장남이라 특별대우를 받은 적도 없었다. 막내도 아니었으니 어리광도 통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말썽 없이 혼자 노는 아이였다.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내게 아버지는 그날 한껏 특별대우를 해 주신 것이다. 그것도 나만을 위하여.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아버지의 이러한 비밀작전은 동생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나만을 위한 아버지의 그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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