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며칠 전, 서문CGV에서 청주영상위원회 지원작인 ‘슈퍼 히어로’ 단편영화를 관람하였다.

춘천 SF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인지라 기대가 컸다. 영화는 연극인들의 삶을 모티브로 한 내용으로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내용인즉 연극의 3요소는 무대, 배우, 관객이지만 영화에 나오는 극단의 소극장에는 무대와 배우만 있다.

관객이 없어 2년 동안이나 극장 임대료를 내지 못했고, 관객을 모으기 위해 애원하는 모습도, 매끼 라면으로 해결하는 모습까지 한 장면 한 장면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청년 예술가들의 삶을 관람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코믹한 연기에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히어로’ 하면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아놀드 슈왈제네거처럼 영웅적이거나 적어도 존경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이라야 한다. 외모만 보더라도 시선을 쉽게 끌어당기는 인물이어야 하고, 사회의 부패와 사악한 존재에 맞서 당당히 승리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야 ‘히어로 답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들은 살아있는 눈빛도 없고 말투마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제목이 ‘슈퍼 히어로’가 아닌가. 마블의 히어로는 아니더라도 뭔가 있겠지 싶어 기대를 내려놓지 않았다. 씬이 바뀔 때마다 기다림은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영화 후반부에서 이 영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정한 히어로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의 기회가 와도, 쉽고 빠른 길이 찾아와도 자신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꿋꿋함이 있어야 하고, 고집스럽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것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히어로이다.

꿈을 위해 비루한 일상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에 큰 박수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상념에 빠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과연 후회 없는 선택을 해왔는지 반문해 본다.

의식주에서부터 투자, 아이들 교육, 내 자신이 옹호하는 신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항들에 대해 수시로 결정을 했지만, 모두 적절한 선택을 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부적절한 선택마저 적절한 선택이라 믿으며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거듭 겪으며 스스로의 오류와 과오를 줄여나가고 미래를 대비하는 삶이었다. 결국 선택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오늘 아침 뉴스를 통해 이 시대의 히어로를 만났다. 신호대기 중이던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넘어져 의식을 잃은 어린이를 보았다. 입안에 피가 가득 고인 어린이에게 심폐소생을 하여 의식을 되찾게 하고 자신의 차에 태워 병원 응급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사례비도 사양한 그는 어린이의 어머니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정한 ‘슈퍼 히어로’는 자신이 선택한 일을 책임질 뿐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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