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진명

[충청매일] 우리가 학교 다니던 1970년대에는 대학교마다 본고사가 있었습니다. 자연히 본고사로 가기 위한 예비고사가 시행되었죠. 이때 국어시간에 반드시 외워야 하는 글이 2가지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에서 구구단이나 인수분해 공식처럼 안 외울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뭐냐면, 정철의 ‘관동별곡’과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대학 본고사는 물론 예비고사에 단골로 나오는 글로, 안 외우면 견딜 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1969년 박정희가 추진한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이후, 저도 한 단원의 글을 통째로 외운 제 인생의 쓴약같은 사례가 되었습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은 외우면서 옛말이 어려워서 고생을 했지만, 두고두고 그 무식한 주입식 공부방법에 고마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좋다.’는 사마천 사기의 말에 적합한 문장들이었습니다. 이후 제가 국어교사가 된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웬만하면 이 ‘관동별곡’은 외우라고 추천하는 명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는 이와 정반대로 달랐습니다. ‘쓴 약이 몸에 좋지 않고, 몸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례를 이 글에서 보았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나서는 안 될 그런 나쁜 글의 본보기입니다. 거기에 쓰인 문장들이 우리 말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괴상망측한 문어체이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망하여 외국의 문물이 쏟아져들어올 때이고, 당시 일본에 유학한 어설픈 지식인들이 일본어 문장으로 우리말을 밑동째 도려내려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의 문장 중에서 최악의 문장이 바로 최남선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이 버젓이 일본에 저항하는 글로 등극을 한 것입니다. 일본어보다 더 일본어스러은 말투로, 일본과 끝장을 보려는 사람들의 영혼을 욕보인 것이,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 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人類平等의大義를克明하며, 此로써子孫孫代에誥하야民族自存의正權을永有케하노라.

기미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입니다. 세상에 이런 문장은 우리 겨레 5천년의 삶을 통틀어 없었습니다. 최남선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나온 문장이고 말투입니다. 앞서 말과 글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틈이 우리 민족사 5천년 동안 가장 많이 벌어져서 차마 눈 뜨고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런 국적불명의 문장으로, 세계사를 뒤흔들 3·1운동을 선언하는 일을 했다는 게, 저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이따위 문장으로 민족정신에 똥칠을 한 최남선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최남선이 친일행적을 하여 반민특위의 조사까지 받지만, 이 문장이 저지른 죄에 견주면 그런 죄는 그리 크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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