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수확을 끝낸 가을 들판은 파리하니 야위어가고 있었다. 풍요를 품었던 대지도 이제 휴식에 들어갈 참이다. 고추밭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고춧대가 마른 할아비처럼 간신히 찬 바람을 버텨내고 있다. 늦둥이 고추는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면서 멈춤을 모르는 듯하다.

농사를 짓는 지인을 만났다. 주섬주섬 지고추를 따더니 한 자루나 안겨준다. 삭혀서 먹기도 하고 밀가루를 묻혀 쪄서 말리거나 양념장에 무쳐 먹으란다. 그래도 남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으란다. 넉넉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만 주세요. 나도 집에 많이 있어요.” 하자 그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차 싶었다.

전에 잠시 텃밭을 일군 적이 있다. 상추며 호박, 배추, 부추 등등 밭에만 가면 마트가 따로 없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도 대견하려니와 여전히 대지의 숨결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채소를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 먹기 아까워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탐이 날 정도로 싱싱한 그 맛을 어서 빨리 맛뵈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내 마음을 아는 듯 반기며 고맙게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나도 있는데…” 한다거나 “에이~ 그거 요즘 마트에 가면 세일 하는데 뭘 힘들게 갖고 와요?” 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것을 받아먹고 나중에 갚으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며 부담스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는 서울쥐가 엇셈을 모르는 시골쥐의 마음을 어찌 알랴.

한번은 김장용 항암 배추를 심었는데 배추가 실하게 잘 영글고 푸른 잎사귀가 너무도 싱그러워 바라만 봐도 흐뭇하고 대견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그러려니와 맛 좋고 싱싱한 배추를 누구에게라도 나누고 싶었다. 반응은 의외였다. 배추가 아무리 좋아도 일일이 씻어서 절이기가 힘드니 절임배추를 사겠단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나눔이라는 것도 바쁜 도시 사람에게는 오히려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게다가 시골 인심은 손이 크다. 한 주먹이면 될 것도 한 자루씩 건넨다. 이웃과 나누어 먹으라지만 그 많은 이웃을 두고도 왕래하는 이웃이 드문 도시인에게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차로 실어날라 나누어줄 만큼 한가롭지도 못하다. 시골쥐가 서울쥐의 마음을 어찌 알까.

언젠가는 생각다 못해 부추를 베어다가 봉지봉지 담아서 엘리베이터 안에 갖다 놓았다. ‘직접 농사지은 무공해 무농약 부추입니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라고 써 붙였더니 30분도 안 돼서 모두 사라졌다.

흙을 만지는 농심(農心)은 대가 없는 그냥 나눔이다. 수확의 기쁨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까. 내 손으로 지은 알곡을 보고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면 족하다.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은 아이의 그 마음이다.

겨울이 코앞이다. 이미 지고추는 다 준비되었고 이제 김장을 해야 하는데 형편상 절임배추를 주문해야 하는 나는 시골쥐인가 서울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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