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 삼아 앞산을 걷는다. 이 산과 친구 되어 걸은 지도 십여 년이 넘었다. 도심 속에 자리한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산에 들어서면 숲의 향과 나무의 향이 코끝에 스며들어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특히 산죽이 무리를 지어 자라는 곳을 지나 때면 알싸한 죽 향기가 약효로 받아들여지면서 피로 회복제를 마시는 것만 같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은 안온함과 청량감을 주어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오솔길 옆에는 고사목 한 그루가 서 있다. 고사목은 시대를 가늠하는 솟대처럼 의연하게 홀로 서 있다. 날카로운 고사목 나무 꼭대기에는 까마귀가 앉기도 하고 황조롱이와 어치 새가 날아들곤 한다. 황조롱이는 세상의 기운이 불안한 듯 시내를 굽어보기도 하며 사유하듯 먼 곳을 응시하다 날아간다. 가끔은 산까치의 상서로운 소식에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늘 같은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맹금류의 출현으로 순하고 연약한 새들은 접근도 하지 못했다. 맹금류의 새는 나무 꼭대기에 앉아 숲의 호위무사라도 된 듯 소리 높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런데 어느 날 고사목이 잘려나갔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고사목이 병들어 죽은 쓸모없는 나무로 비쳤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수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강고함이 남아 있을 터인데 말이다. 자리를 잃은 새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휑한 자리 끝에는 햇빛과 바람만이 잘려나간 그루터기를 말리고 있다.

이제는 새를 기다리는 일이 사라지니 나의 가슴에 사유의 새가 날아든다. 몸통이 잘린 고사목의 그루터기를 보며 생명의 한계를 읽는다. 푸르름이 성성했던 지난 시간도, 아픔과 상처도 옹이로 키우며 살아냈던 세월도 때가 되면 고사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로병사 이치이련만 그 순리마저 거스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루터기에 앉아 아직은 성성한 나무뿌리를 만져 본다. 등은 굽었지만 차가운 수분이 남아 있어 손바닥에 전해져 온다.

그루터기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요긴한 쉼터가 되기도 했다. 들일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그루터기는 간이의자였다. 그루터기에 걸쳐 앉아 숨을 고르고 힘을 충전했다. 나의 그루터기는 어머니였다. 언제나 찾아가 안길 수 있는 그루터기, 마음이 불안할 때도 속상할 때도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가 가신지도 10여 년이 넘었다. 가신 뒤에도 어머니란 그루터기에 수없이 앉고 기대곤 했다. 그런 내가 이만큼에서 그때의 어머니를 닮아간다. 어머니가 앉아 쉬시던 길가의 그루터기처럼 나 또한 내 아이들의 앉음 터가 되었고, 아이들의 쉼터로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보기에는 멀쩡했던 고자바리를 발로 툭 치자 힘없이 부서지던 것처럼 나 또한 그리되어 갈 것이다.

나무의 한 세기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로, 한 시대를 지켜낸 증인으로 결코 고자바리가 아닌 단단한 뿌리로 남겨진다.

역사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나의 그루터기는 과연 얼마나 남아 있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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