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신화를 기록한 ‘신이경(神異經)’ 이야기가 전해진다.

혼돈(混沌)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살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다. 형태는 개의 모습을 하고 온몸에 긴 털이 가득 있고 발은 곰을 닮았다.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 못했다.

눈뜬장님이어서 우주 밖 어디를 함부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꼬리를 장난감 삼아 물고 제자리를 빙빙 돌기만 했다.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없었고, 그저 하늘을 보고서 웃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제자리에 있다가도 덕망이 있거나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면 화를 내며 미워했다. 반면에 악하고 나쁜 자를 만나면 반가워서 살랑살랑 아첨하며 달라붙었다.

창세 전의 상태로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았고 오로지 어둠뿐인 암흑 상태를 혼돈이라 한다. 하지만 혼돈은 오래가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천지가 개벽하여 하늘과 땅이 생기고 인류가 탄생했다. ‘장자(莊子)’에는 혼돈에 관해 다음과 같은 우화가 전해진다.

옛날 옛적, 세상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단지 세 명의 신(神)이 살았다. 남해의 제왕은 숙()이었고,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었고, 중앙의 제왕은 혼돈(渾沌)이었다. 숙과 홀은 암흑 밖에 살고 있었고, 혼돈은 암흑 속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숙과 홀이 찾아와 혼돈에게 어울려 놀자고 했다. 마침 어둠 속에서 심심했던 혼돈은 이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극진히 대접했다. 대접을 받은 숙과 홀은 아주 고맙게 여겼다. 나중에 돌아가서는 혼돈에게 보답할 방법을 서로 의논했다. 숙이 물었다.

“혼돈이 우리에게 잘해주었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을까?”

그러자 홀이 대답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원래 사람들은 눈, 코, 귀, 입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 쉬잖아. 그런데 혼돈에게는 그런 구멍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하겠어? 그러니 우리가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어 편하게 해주자!”

이야기를 들은 숙이 기뻐 말했다.

“그거 정말 좋은 방법인데. 당장에 실행하자!”

다음날 숙과 홀은 도끼를 가지고 혼돈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너에게 구멍을 뚫어줄게. 구멍이 생기면 아주 편해질 거야.”

그렇게 혼돈을 위해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구멍이 모두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구멍이 뚫린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데 혼돈은 그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암흑천지(暗黑天地)란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를 말한다.

현실에서는 암담하고 비참한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생각이나 인식이 모호하고 흐리멍덩한 사람을 혼돈씨라고 부른다. 사회나 국가가 어둠 속으로 빠져들 때는 그 나라의 지도자가 언제나 혼돈씨였다. 이 교훈을 새삼 명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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