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전업주부로 나는 직장인으로 서로 가는 길이 달랐던 30년 지기이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가끔씩만 만나다가 요즘 내가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니 친구는 단박에 달려왔다.

농다리를 건너 미호천 전망대 쪽으로 걷기로 했다. 여인의 허리처럼 굽은 산책길은 아스라이 꼬리를 감추고 우리는 그 꼬리를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쥐꼬리망초, 긴 줄기를 따라 도로록하게 핀 보랏빛 오리방풀, 뾰루퉁한 입술모양의 송이풀…. 우리는 연신 셔터를 누르고 검색을 해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을 들어 저만치 바라보니 길가에 불그스름하게 좌악 깔린 무언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다. 여뀌군락이었다. 여뀌가 가로수 아래서 나지막이 피어서 주변 풍경과 제법 잘 어울린다.

여뀌는 주로 습지나 개울가에 핀다. 어렸을 적 멱감을 때 많이 보아와서 눈에 익숙하다. 어린 손주의 가녀린 손가락 같은 송이에 쌀 톨 같은 분홍 꽃송이가 소도록하게 달렸다. 열매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고 작은 하나하나가 다시 꽃을 피운다. 여뀌는 흰색도 있지만 역시 분홍빛이 눈에 잘 띈다.

분명 꽃임에도 화려하거나 감탄할 만큼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이제껏 없었다. 그런데 잔잔하게 모여 널리 피어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안개치마를 펼쳐 놓은 듯하다. 한 송이 보다 군락을 이루니 훨씬 보기가 좋다. 보통은 키가 들쭉날쭉한데 아마 비슷한 키높이 때문에 예뻐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카메라에 앵글을 맞춘다. 여뀌에 핀을 맞추고 보니 분명 여뀌가 주인공인데 여뀌만 가지고는 그림이 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좀 더 줌아웃하니 삼나무 가로수 길도 미루나무도 함께 어우러진다. 설핏설핏 보이는 구름 하늘이 색의 조화를 이루고 나뭇잎 사이를 파고드는 초가을 햇살이 명암을 넣어준다. 분홍이 연두, 초록과 함께 절묘한 배합이다. 주변에 가로수가 조연이고 미루나무와 구름과 하늘과 빛이 엑스트라다. 여뀌가 화려해서가 아니라 조연과 엑스트라가 있어 더 빛이 나는 풍경화다.

사람도 그렇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곁에 사람이 있으므로 부족함을 채우며 산다. 남으면 덜어주고 모자라면 채워주는 관계라야 조화롭다. 비슷한 사람끼리 자신을 낮추어 키높이가 맞아야 서로가 빛이 난다. 아무리 유능한 공격수라도 골키퍼의 활약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는 것처럼 주인공과 조연이 따로 없어야 관계가 매끄럽다.

내가 바쁠 때 늘 기다려주던 친구가 고맙다. 나는 그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그 친구는 고맙다 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넘치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주연일 땐 친구가 조연이고 친구가 주연이면 내가 조연이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귀히 여기니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벌써 해가 반쯤 기울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느긋한 나를 보고 적응이 안 된단다. 오전에만 잠시 만날 수 있었던 지난날의 불편함을 이제야 털어놓는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여뀌가 친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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