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오랜만에 문의 문화재단지를 찾았다. 진초록 나무들의 사열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니 오른쪽으로 고가(古家)가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자 대청마루에는 ‘앉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문객을 감시하고 있다.

뽀얗게 분을 뒤집어쓴 마루에는 앉으라 해도 못 앉을 터였다. 텅 빈 방 안에 제멋대로 부서진 고가구는 먼지가 무겁다 한다.

한때 떠르르 하던 양반댁 규수들의 잰걸음이 뜨락을 오가는 모습을 상상하다 담장에 난 구멍을 발견했다. 아마 집 안에만 있던 여인들을 위해 바깥세상을 가끔 내다보라고 만든 구멍일 터였다.

그녀들은 바깥세상을 동경하기도 하고, 심란한 마음을 상상으로 달래기도 했을 것이다. 구멍은 희망으로 가는 통로다.

학교가 퍽이나 가고 싶었던 나는 나이가 모자라서 입학은 못 하고 학교 주변만 맴돌곤 했다. 개구멍이 나를 유혹할 때면 용기가 샘솟았다. 치마폭을 앞으로 여미고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자세를 낮춘 다음 다리부터 들이밀어야 한다. 학교는 내게 꿈이었다. 꿈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쉽지 않은 법이지만 개구멍은 미래를 조금이나마 미리 맛볼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통로였다.

여인들이 바깥세상을 보던 그 구멍이 궁금하여 나도 따라 밖을 내다보다가 반대편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구멍을 통해 여인들은 미래를, 나는 과거를 들여다본다.

뜨락에는 맷돌과 절구가 놓여있고 흙벽에는 광주리와 소쿠리가 걸려 있다. 색이 바래 윤기 없는 광주리와, 푸석하게 말라버려 금방이라도 바스락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소쿠리가 무심하다.

마치 코로나19에 지친 우리들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이 역력하다. 열린 눈으로 보았을 때는 그냥 스쳐지나갔던 소품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구멍은 그냥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담는 공간이었다.

구멍은 크기와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얼굴에도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눈이 작다고 적게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작다고 소리를 못 듣는 것도 아니잖은가. 입이 작아서 할 말을 못 했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작은 구멍이라야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자세히 볼 때 실눈을 뜨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늘구멍도 실눈을 뜨고 입을 잔뜩 오므린 채 초집중을 해야 실이 통과할 수 있다. 둘이었던 것을 하나로 이어주고 비어있던 곳을 메워주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통로가 아니던가. 바늘구멍 역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구멍이다.

역사는 현재라는 구멍을 통해 미래로 간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마다 후보자 선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대 후보의 비리를 들추어내느라 혈안이 된 사람보다 진정한 정치철학을 가진 후보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국민 하나하나의 작은 구멍을 두려워할 줄 아는 그런 후보자 말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