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문학작가회, 수필가

 

코로나 방역 거리두기에 집콕족이 된 탓인가. 마음이 울적하여 푸른 숲이 우거진 산사를 찾았다. 적막한 절 입구에 있는 작은 연못에 핀 연꽃이 내 시선을 끌었다. 물 위에 떠있는 연꽃을 바라보는 순간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연근(蓮根)은 깊은 물속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어찌 저 넓고 큰 잎과 연등처럼 생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 뿌리는 심연(深淵)에서 꽃을 피우기 위하여 어둠속에서 얼마나 많은 번뇌(煩惱)와 인고의 아픔을 겪었을까.

보이지 않는 연근의 아름다운 노력은 자연의 섭리(攝理)라 하지만 천상의 성스러운 꽃을 피우니 불심의 은혜를 입었음이요, 석존(釋尊)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 얻었으니 불심을 축복하는 환희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가 어느 한 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존귀한 생명의 탄생에는 연근처럼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음이요, 그 근원을 찾아보면 선조들의 얼과 혼을 이어 태어난 존재이다. 슬프고 괴로워 세상살기 힘들다 해도 인간의 탄생 그 자체만은 축복이요 부모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아들 딸이 잘 되라고 어떠한 희생도 참아가며 사시는 우리들의 부모님. 그 사랑과 정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요. 인류문명의 발전도 선조들의 빛난 얼과 피땀어린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뿌리는 성장과 번영을 가져오는 존엄한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있기에 뿌리사랑은 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세’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끝힐세’ 하는 서사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왕조 넷째 임금이신 세종대왕은 선조들의 빛난 업적을 처음 창작한 한글로 가사를 지은 용비어천가로 국본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글이 있어도 어려워 알지 못하는 백성의 고충을 살펴 알기쉬운 한글을 만드셨다. 이것이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민본주의라 할 뿌리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유평등을 근본으로 하는 민주주의도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민본사상도 뿌리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효(孝)가 인륜의 근본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행일까. 부모에게 효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 뿌리를 위하는 일인데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 것일까. 이세상 어느 부모도 자식을 선택해서 기르지는 않았다. 자식은 효도를 놓고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하고 계산부터 할지 몰라도 부모는 손익을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이 남보다 훌륭하게 될 수 있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이 부모마음이다. 효행은 인생에 선택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잠잘 곳이 없어도 해야 되는 필수다.

나를 낳고 기른 뿌리와 같은 부모님 사랑에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는 못할 망정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허다한 세상이다. 병든 부모님을 모시기 힘들다하여 내다버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시해(弑害)까지 하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늙어가는 내 마음에는 슬픔만이 가득하다. 우리 부모마음은 자신은 연근처럼 진흙에 뿌리를 박고 살아도 자식만은 연꽃처럼 아름답게 피어 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연근과 같은 뿌리사랑을 잊을 길 없어서 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산사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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