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충청매일] 어린 날 할아버지는 어렵기만 했다. 왜 우리 할아버지는 늘 엄해서 옆에 가지도 못할 만큼 어렵게 하셨을까? 할아버지는 우리를 귀여워한다기 보다 낯설고 무서운 손님같았다. 나이들어 보니 그 때 할아버지는 아이를 겉으로 표나게 예뻐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아는 관습에 충실하게 지내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와 새삼 물을 것 없이 할아버지는 대답할 수 없는 곳으로 이 세상을 뜨셨으니 자상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를 책 속에서 만나 대리만족을 해 본다. ‘기적’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영국의 대 작가 샘 어셔의 ‘비오는 날의 기적’이다. 비 내리는 여름날 할아버지와 손자가 그려내는 포근한 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은 현관 계단에서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원망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진 표지를 보면 과연 도대체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샘 어셔의 시원시원한 그림들은 바다가 아니라도 멋진 비 바다를 만들어 낸다.

한여름 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아이는 비와 아랑곳없이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다. 할아버지는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안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나’는 빗속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빗방울도 받아먹고 싶고 물웅덩이에 첨벙거리며 온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것도 보고 싶다고 아이답게 말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고만 한다. 아이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과연 비가 그칠까 묻고 또 묻는다. 바다 괴물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도 할아버지는 비가 그치기를 좀 더 기다리자며 편지만 쓰신다. 그사이 아이는 수상 도시에도 가고 곡예사와 신나는 축제 노래하는 뱃사공도 보고 싶다고 한다. 드디어 할아버지는 편지를 부치러 가자며 밖을 향하고 비가 그칠까, 생각하는데 마침내 비가 그친다. 망설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할아버지는 나를 선장으로 임명한다. 둘이는 이제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빗방울도 받아먹고 편지도 직접 부쳐보고 멋진 여행을 한다.

따스한 양말과 따끈한 코코아가 기다리는 보송보송한 세계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들은 꾹 참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단다”라는 말을 해준다. 아이는 내일도 비가 오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대와 세대를 이렇듯 따스하게 이어주는 지혜는 우리 나이 든 세대들의 몫이겠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동심을 이해하고, 아이는 할아버지의 조언과 안내 덕에 서로 더 가까워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상상 세계를 인정해 주고 그곳에서 같이 뛰어놀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속 따스한 이야기다.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손자를 옆에 두고 편지를 쓰면서 인내를 알려주고 그 인내를 서서히 익혀가는 아이에게 함께 상상 여행으로 보답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또한 비는 상상의 세계를 실제로 여행하게 해주는 기적을 베푼다.

기후 위기 때문인지, 국지성으로 후다닥 내리는 비와 이따금 몰아닥치는 태풍이 가라앉아 비도 좀 차분하게 내리는 때 마침 아이가 옆에 있다면 노란 장화와 앙증맞은 비옷을 입게 하자. 든든한 어른으로 우리가 옆에 있어준다면 비바람에 휩쓸려 달아나려는 우산을 붙잡으려 애쓰는 노력도 아이에게는 재미있고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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