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910년, 황소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당나라는 여전히 불안했다. 중앙 권력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지방은 절도사들이 나름대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희종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었다. 천하 권력을 쥐기 위해 이번에는 반란군 진압에 앞장선 50대 절도사 주전충과 30대 절도사 이극용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셈이다. 이 둘은 서로 백중지세였는데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뜻하지 않은 인사 발령이었다.

환관의 우두머리인 전영자는 왕의 권력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으로 삼았다. 그 권력으로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로 다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러니 재물이 생기는 곳이면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려 애썼다. 마침 하중 지역은 소금의 주요 생산지로 세금이 많이 걷히는 곳이었다. 그곳의 절도사는 반란군을 몰아내고 장안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왕중영이었다. 전영자가 이곳을 자신의 수중으로 넣기 위해 왕중영을 태녕 지역으로 발령을 낸 것이었다. 왕중영은 상을 받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자신의 기반인 하중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왕중영은 발령에 항의하며 하중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절도사 이극용과 접선을 하였다. 마침 이극용은 세력을 업어 주전충을 없애고자 했고 왕중영은 세력을 업어 환관들을 몰살하고자 했다. 서로가 뜻이 맞은 상태였다. 이극용이 먼저 제안했다.

“우리가 힘을 합쳐 먼저 멧돼지 주전충을 몰아냅시다. 그런 다음에 궁궐의 쥐새끼 전영자를 없애버립시다. 어떻습니까?”

그러자 왕중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당신 생각도 일리가 있소. 나 역시 나쁘다고 생각지 않소. 하지만 그 계획대로 실행한다면 나는 아마 중앙에 포로가 되어 있을 것이요. 내가 잡혀가면 당신 계획은 실행도 하지 못할 것 아니오? 그러니 마음이 급하더라도 먼저 궁궐의 쥐새끼를 몰아내고 그다음에 멧돼지를 잡읍시다. 어떻소?”

결국 왕중영의 제안대로 전영자를 포함한 중앙의 환관들을 먼저 소탕하기로 했다. 며칠 후 이극용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보고를 받은 전영자는 희종을 모시고 급히 봉상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극용은 희종에게 전영자를 처단하고 왕께서는 장안으로 돌아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이는 전영자를 처단하지 않으면 왕은 장안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협박이었다. 전영자는 다급하여 희종을 모시고 더 멀리 자신의 기반인 사천지역으로 달아났다. 얼마 후 희종이 병이 들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 사망했다. 전영자는 여전히 사천에 머물렀다. 이 사건으로 이극용은 왕중영을 돕는 척하며 중앙의 모든 세력을 자신의 휘하로 넣었다. 변방에 주전충이 비록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천하의 권력은 누가 봐도 이극용이 쥐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신당서(新唐書)’에 있는 이야기이다.

일합일리(一合一離)란 한번은 붙고 또 한 번은 떨어진다는 뜻이다. 자신이 불리할 때는 서로 같은 편이지만 유리할 때는 서로 적이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선거는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덜 나쁜 사람을 뽑는 것이다. 그렇다고 멧돼지와 쥐새끼를 대표로 뽑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aionet@naver.com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