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말과 글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은 입안이라는 3차원 공간에 시간이 덧붙어 만들어진 4차원 세계입니다. 허파에서 나오는 바람이 입이라는 일정한 틀에 부딪히면서 시간차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는 2차원입니다. 평면에 꺼먼 연필로 그려진 것이 글입니다. 그러니 4차원에서 2차원으로 2차원이 줄어들어 버리니, 글이 소리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담을 수는 없죠. 그래서 글자는 효율성을 따져서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한글은 굉장히 유리합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글자들은 소리에 맞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고대 문자로부터 조금씩 발전하여 알파벳을 각 민족이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중국이 자신의 글자를 컴퓨터 화면에서 찾기 위해 소리를 베끼는 수단으로 영어의 알파벳을 가져다 쓴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로마의 알파벳이 그 지배영역의 모든 민족에게 표현 수단을 제공해준 것이고, 그것이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 여러 나라의 알파벳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러시아의 키릴 문자는 아주 독특한 형태로 다른 유럽의 알파벳과 많이 달라졌죠.

이렇게 남의 알파벳을 제 겨레 글로 고르면 불편하게 됩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이와 달라서 처음부터 우리 겨레의 소리를 적으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 가장 적합한 표기수단입니다. 마치 알파벳이 이탈리아 말을 적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죠. 요즘도 이탈리아어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알파벳의 음가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같은 다른 언어는 같은 알파벳이어도 읽는 방식이 다 다르죠. 그래서 발음기호를 따로 정하여 제 소리를 정확히 적습니다. 이탈리어어를 자기네 방식으로 적용해서 쓰고 읽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 사이에는 틈이 있고, 그 틈은 작을수록 좋습니다. 그러자면 그 겨레의 말씨와 소리에 가장 적합한 짜임을 지닌 글자가 쓰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예 우리 말과 소리에 딱알맞은 글자를 우리가 쓴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죠. 이런 행운은 아무 겨레나 다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삼 세종 임금님께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글은 말과 글 사이의 틈이 가장 적은 글자입니다. 그래서 입에 짝짝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문법이 이 틈을 자꾸 벌려놓습니다. 문법을 지킬수록 말과 글 사이에 자꾸 틈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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