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백제 26대 성왕이 옥천 군서면 구진벼루에서 신라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의 매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성왕은 아들 부여창(27대 위덕왕)이 신라에게 빼앗겼던 옥천 관산성을 탈환하고, 다시 김무력 장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전(금산군 추부면)에 진을 치고 있다가 급히 말을 달려 관산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만 50여 명 군사만 이끌고….

32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한강 유역까지 회복한 백제 중흥의 성군이 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그것은 바로 오만이다. 전시에 국왕이 이동하는데 어찌 50여 명 군사만으로 할 수 있었을까? 이 사실이 세작을 이용한 정치의 달인 김무력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아무리 성군이라도 한 순간의 실수로 백제의 역사 뿐 아니라 삼한의 역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김무력의 매복군 중대장은 천민 출신 도도이다. 신라 국왕은 바로 성왕의 사위인 진흥왕이다. 백제 백성들의 성왕에 대한 존경과 신임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김무력은 성왕이 진흥왕의 장인이라는 것을 알고 생포 즉시 참수하라고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천민 출신 중대장 도도는 의기에 넘쳐 소리쳤다. “대왕이시여, 제 칼을 받으소서.” 성왕은 아무리 포로가 되었지만 천민의 칼을 받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성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한 마장쯤 가면 아들 부여창의 군대가 있는데 여기서 죽어야 했다. “너의 천한 칼에 죽을 수는 없다. 마지막 부탁이니 나의 이 보검으로 죽여 달라.” 성왕은 칼을 풀어 도도에게 주었다. 도도는 칼을 받아 성왕에게 두 번 절하였다. 적국의 국왕에게 대한 마지막 경의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렇게 백제 중흥의 성군 성왕은 어이없게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부여창은 흥분하여 작전도 없이 김무력 장군에게 덤비다가 불쌍한 2만9천6백 명의 군마가 백골산성에 피를 뿌리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부여창은 수십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비로 도망쳤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삼한통일 경쟁에서 백제의 최후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때부터 백제의 국운은 기울기 시작하여 백년 쯤 뒤에 백제의 역사도 땅에 묻히게 되었다.

만약에 성왕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백제를 중흥하고 진흥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정가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청해부대 장병들이 무더기로 코로나19에 감염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걷잡을 수없이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 검찰총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국회의장, 현재 도지사께서 제 할 일을 버리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사람들을 휩쓸고 돌아다닌다.

이들은 최후의 결정을 맡은 대통령이나 당의 대표나 장관들의 판단이 조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왕의 교훈은 물론이고 바로 4년 전 탄핵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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