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이제 미술 학원에라도 보내야겠어요.”

“……? 아이가 그림을 좋아하나 보죠?”

“그게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는 답답한 듯 말끝을 흐린다. 학원을 더 보내자니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고 그냥 집에서 혼자 지내게 하자니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보라고 권해보아도 늘 신통치 않아 하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한단다. 어떤 때에는 집에서 멍하니 혼자 있을 때가 많단다. 이를 지켜보는 엄마는 아이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 된 어린아이인데…….

어렸을 때 나도 비슷했다. 나 역시 늘 마당가를 빙빙 돌며 혼자 지내던 때가 참 많았다. 물론 그때는 글을 모르니 책을 읽을 줄도 몰랐고 장난감이래야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나 병뚜껑 같은 나부랭이를 모아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자서 엄마도 되었다가 아기도 되었다가 어떤 때에는 방앗간 주인이 되기도 했다. 막대기 하나 들고 마당에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면 그 넓은 마당이 온통 스케치북이었다. 뒤뚱대는 암탉을 따라다니는 강아지를 쫓으며 그들만의 세계에 끼어들기도 했다. 비 온 뒤에 생긴, 지렁이처럼 길게 누운 물길을 따라가면 그곳에도 나름 자그마한 세상이 옹그리고 있었다. 나를 외면하듯 잎을 돌돌 말아 입을 굳게 닫은 진분홍 무궁화를 보며 행여 내일이면 다시 피어나지 않을까 허우룩한 기대를 걸기도 했다. 가끔 몽실몽실 피어오른 구름 사이로 햇살이 스미면 요상한 세상이 만들어졌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금방 닿을 것 같은 저 구름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찾아가겠노라 싶다가도 어느새 사라진 구름 동네를 바라보며 퍽이나 아쉬워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상상했던 세상은 동화책 속에 다 있었다. 가르침은 없어도 보고 생각하며 배울 것은 많았다.

상상은 창조의 근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행동으로 내보일 수도 없는 상상은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깊은 샘물이다. 아이들의 눈과 가슴은 어른이 정한 세상이 아닌 자신의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것이다.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가슴에 더 많은 것을 품으려 준비하는 중이다.

부모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하기를 권한다. 아이가 ‘바라는 것’보다 ‘바람직한 것’을 하라고 한다. 뭐라도 꼼지락거리거나 쉴 새 없이 배움의 마당에 뛰어들어야 부모는 마음이 놓인다. 어른의 잣대로 만들어 놓은 기준이나 가치, 목적성에 아이를 맞추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에서 인정받고 유능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마치 인생의 지상 목표인 것처럼. 어떤 특정한 이념을 만들어 놓고 이에 맞추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부모로서 권리남용이다. 생각마저 조종하려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가르칠까 궁리하기보다 아이의 무한한 가슴 속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종(縱)으로 줄을 세운 세상 말고 횡(橫)으로 펼쳐진 세상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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