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충청매일] 오랜만에 사무실 책상 여기저기에 있는 연필 10여 자루를 모아 칼로 깎았다. 베어낸 조각이 구부러질 정도로 나무 끝을 얇게 저미고, 심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하나하나 깎는 데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서너 자루 깎을 때쯤 되면, 언제 다 깎나 하는 조바심이 생긴다. 그래도 호흡에 집중하며 깎아나간다. 다 깎아내면, 큰 숙제라도 한 듯 홀가분하다. 그런데 굳이 칼로 연필을 깎는 이유는 무엇일까?

22년 전, 검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부장님이 칼로 연필 깎는 것을 보았다. 보통은 부속실 여직원이 연필깎이로 여러 자루 깎아 놓는데, 스스로 깎는 모습이 도라도 닦는 듯했다. 그에 반해, 나도 지금껏 따라 하고 있다.

연필깎이나 샤프 연필은 엄청난 기술 발전이다. 연필 깎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깎을 필요조차 없다. 연필 깎는 수고로움(고통)에서 사람을 해방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더 편해지고, 연필 깎는 시간에 더 유익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연필 깎는 수고로움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연필 깎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되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덜 쓰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자동차를 타서 걷지 않게 되어, 계산기로 계산을 해 머리를 쓰지 않게 되어, 세탁기 덕분에 손빨래를 하지 않게 되어, 밭에 비닐을 씌우고 제초제를 쳐 풀을 뽑지 않아도 되어, 아이를 학원에 맡겨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열에 아홉은 그렇다. 그런데 왜 열에 아홉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 편안한 것은, 행복을 다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걸으면, 하늘이 보이고, 바람을 느끼고, 나무와 풀이 바뀌는 모습을 보며, 기운이 돈다. 복잡한 계산을 종이에 적으며 하면,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수 있다. 손빨래를 하면, 때가 빠져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거침없이 자라나는 밭 풀이 무서울 수 있지만, 같이 하면, 다양한 생명력을 느끼고,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아이들과 대화하고, 운동하고, 일을 같이하다 보면, 서로 친구가 되고, 믿음이 생긴다.

사람은 자기 손발을 놀리고, 머리를 쓸 때만 행복할 수 있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다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편안한 것을 쫓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맨날 부딪치는 작은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밥 먹고, 똥 누고, 맨날 가는 길 걸어가고, 또 맨날 보는 사람 보고, 그런 것들. 우리가 사소하다고 치부하는 그런 것들. 그것들이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분임에도 ‘덜 중요하다’는 이유로 무시해 왔다. 그러면서 달리 뭐 대단한 걸 하겠다고 나름대로 의식, 무의식으로 다짐을 한 것 같은데, 마땅히 이루었다고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현재에, ‘지금, 여기’라는 순간으로 존재하고 머무는 것. 글을 쓰는 이 순간, 칼로 한 결씩 연필 끝을 깎아내는 그 순간이, 양보할 수 없는 내 삶이다. 그 순간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삶은 다 행복하다. 칼로 연필을 깎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깎을 때 느끼는 조바심은, 아직 편안한 것에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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