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꿈세상 정철어학원 대표

[충청매일] 하얀 백지였다. 기대에 부푼 나에게 학생들이 덜렁 내민 답지가 단 한 줄도 못 채운 백지였다. 깜짝 놀랐다. 오래전, 한국에서 영어를 2년에서 4년 정도 배운 학생들을 데리고 캐나다에 현장학습을 갔다. 첫 날 대형쇼핑센터에 가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 시간 동안 자유 시간을 주었고 그 대신 첫 프로젝트로 외국인을 다섯 명이상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열 문장이상 그 대화내용을 적어 오라고 한 것이다. 설레는 내 마음과 달리 결과는 참담했다.

“아저씨 지금 몇 시예요? 라고 영어로 말 못해?”

“할 수는 있는데요…”

“그런데 왜 백지여?”

“그런데… 외국인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얗게 되고 눈앞이 캄캄해져요.”

‘……난감하다!’

그 다음 날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책에 있는 다이얼로그를 순서대로 달달 외우며 영어 공부를 한 학생들이다. 그들에게 낮선 곳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과 정해주지 않은 자유로운 대화는 무리였던 것이다. 그들에겐 뚫어야 할 벽이 놓여 있었다.

현지 교사와 비상대책을 세웠다. 아이들에게 잠재된 초능력을 이끌어 내야했다. 모든 일정과 계획을 수정했다. 우리는 학생들을 적응기간 없이 캐나다 학교 교실로 한 반에 두 명씩 투입했다. 강공책을 쓴 것이다. 자매결연을 맺은 캐나다 학교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 학생이 왔다는 소식에 쿠키를 직접 만들어 와서 환영 파티를 해주는 캐나다 학생과 부모의 친절도 한 걱정을 덜어 주었다.

일요일 오전 토론토 지하철 핀치역 앞에 모였다. 이름하여 생존 프로젝트를 실시 할 참이다. 같은 또래 세 명씩 한 조가 되어 핀치역에서 해산한 후 물어물어 찾아서 이튼광장에 집결하는 프로젝트이다. “원칙1, 길을 물을 때는 한명씩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물을 것! 원칙2, 길을 잃었다 생각되면 울더라도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을 것!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선생님이 못 찾고 세계 속에 미아가 된다. 명심 또 명심하고 출발!” 그렇게 11세부터 15세 아이들이 세 명씩 한 조가 되어 다섯 조가 순차적으로 출발했다. 나는 마음 죄이며 멀리서 숨어 지켜보았다. 지하철 표를 사는 방법도 다르고 중간에 내려 환승도 해야 된다. 그 꼬맹이들이 주변 외국인들에게 번갈아 물으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모습이 대견을 넘어 감동으로 눈물겹다.

대형 쇼핑몰에서 개구쟁이 동철이가 과제수행 후 집합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두 동철이의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겉으로는 태연히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아이들을 달랬다. 드디어 동철이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걸이도 의연하고 당당하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무용담으로 목청을 높인다. 8달러하는 기념품을 사고 10달러를 줬는데 거스름돈을 적게 주더란다. 설명하고 따져서 안 주려는 2달러를 기어코 받아냈단다. 상점 주인이 15%세금을 설명했겠지만 그 어려운 어휘는 그에게 효용이 없었을 것이다. 꼬치꼬치 따지는 동양 꼬맹이가 귀여워 그냥 내어 준 것 같다. 잘했다고 꼬옥 안아주었다. 며칠 전엔 입도 못 떼던 아이였다.

아이들의 내면에 잠재된 역량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자식의 모든 것을 챙겨주고 해결해 주어 아이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오히려 짓누르는 것은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틀에 박힌 교육이 학생들의 잠재된 역량을 일깨워 주지 못하고 역량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닐까?

멀리 타국 낮선 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던, 외국인들을 만나 과제를 수행하던 수첩 든 꼬맹이들이 나의 마음 속 길잡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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