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충청매일] 지난 겨울, 나는 승용차를 야외로 몰고 있었다. 갈 데가 특별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집안에만 있기에는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가 1년이 넘게 지속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다. 방에만 콕 들여 박혀 있다는 게 쉽지 않았다. 어디 유원지에라도 가보고 싶지만 그곳 역시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을 피하며 걷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오랜만에 처가에라도 들러 보면 어떨까도 싶었다. 그런데 처가 역시 도심 한복판이고 그곳 역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인지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내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갈 곳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인근 도시의 근교에 있는 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장인어른이 묻혀 계신 곳이었다. 차를 산 아래에 주차시키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상한대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눈이 보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그렇게 30여분을 걸어서 묘지에 도착했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비로소 마스크를 벗었다. ‘아!’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맑고 깨끗한 공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상쾌했다. 코로나에서 해방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도 가슴을 뒤로 젖힌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10여 년 전에 신종플루로 유명을 달리하신 장인어른 묘소에서 자유롭고 상쾌한 기분으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킬 수 있었다. 묘지를 둘러보며 장인어른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만 같은 깨끗한 자연 속에 한동안 머물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종종 장인어른의 산소를 찾았다. 물론 그때마다 장인어른은 우리에게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봄이 되어 청주에서 가까운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지도 찾았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내 어린 시절에 작고하신 아버지와 몇 해 전에 아버지 곁으로 가신 어머니는 우리에게 맑고 깨끗한 공기 외에도 곱디 고운 꽃을 선물해 주셨다. 공원에는 목련이나 벚꽃 그리고 철쭉을 비롯한 온갖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있었다. 오이꽃, 고들빼기꽃 등으로 이름도 모르던 들꽃도 많았다.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에는 동생 내외와 우리 부부 그렇게 넷이서 공원묘지를 찾았다. 그날도 부모님은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는지 공원 전체에 꽃 잔치를 벌여놓고 계셨다. 특히나 꽤 오래 되었을 법한 나무에는 탐스럽기까지 한 붉은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꽃 검색을 해보니 벚꽃이었다. 우리들은 그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묘지를 찾다보면 엄숙하고 슬픈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긴 했지만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빠져들며 순간순간 웃고 때로는 고인에 대한 추모의 애틋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공원에 머물 수 있었다. 공원에도 역시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숙연함과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아마 앞으로도 우리 내외는 공원묘지를 자주 찾을 것 같다. 물론 장인어른도 찾아뵐 것이다.

코로나19로 너도 나도 힘들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우리들 모두에게 닥친 이 위기를 잘 견뎠으면 한다. 원망하고 한탄만 한다고 이 공포스런 질병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모아 이 위기를 다 같이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승에 계신 부모님들께서도 우리의 소망을 같이 빌어주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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