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충청매일] 우리가 유년을 기억할 때 아늑한 그리움에 가까운 정서에 잠기기도 하는 건 아마도 어른들의 호의와 환대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시절 외가처럼 나이들어가면서도 떠올릴만한 장소,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엄청난 단어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선물같은 시간을 보낼만한 대상이 있다면 좋겠다. 사는 일에 좀 피로해져 가방하나 들고 훌쩍 다녀올 만한, 아니면 들고 갈 무언가를 생각하면서부터 미리 흐뭇해지고 감정이 느긋해지는 그런 곳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어른이 될수록 떠올리게 되지 않던가.

‘언제나 나를 사랑으로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입니다.’

러시아 애니메이션 감독 나탈리아 체르니셰바의 ‘다시 그곳에’라는 책은 뒤표지에 적어둔 글귀처럼 한 여자의 동선을 따라 가며 아련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글이 없어 단순한 듯하지만 깊이 있다.

한 젊은 여인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빼곡한 빌딩 숲을 달린다. 두 쪽에 걸쳐 숨이 헉헉 차오를 듯 꽉 채워진 도시 모습. 시끄러운 거리 음악이 흘러나오고 자동차들은 빵빵댄다. 매연이 코를 지나 가슴을 두드릴 즈음 버스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든다. 긴장의 끈이 툭 풀리는 순간이다. 버스는 한숨을 돌리듯 침엽수가 울창한 숲을 지나 확 트인 벌판에 여인을 내려놓고 떠난다. 여인이 내려 선 곳 멀리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왼쪽 지면에는 오버랩된 여인의 모습을, 오른쪽 지면엔 아주 작고 빛바랜 사진 같은 집 한 채를 배치해 여인의 성장과 마음을 담아냈다. 그 다음 장면은 두 다리가 지면 가득 표현되고 점점 크게 표현되는 집이 나온다. 행복했던 그곳의 추억들은 이젠 누군가를 보호하고 사랑하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강요도 없이 긴장의 순간도 없이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따스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소리와 자연의 소리만이 그녀의 곁에 있다. 세상에 나가기 전에 느꼈었던 익숙한 냄새 익숙한 소리 익숙한 느낌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 여인에게 온 것이다. 그곳에서는 온갖 것들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있던가. 생활이 버겁고 힘들때 훌쩍 다녀와 또다시 힘을 얻을 만한 그런 곳.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그런 곳은 우리 집이 아닌 외가였다. 그곳은 어리지만 사는 게 뭐이래 싶을 때면 나를 위해 팥고물 찐빵을 머리 벽장에 숨겨놓고 기다리는 외할머니가 계시고 달구지를 태워 굽이굽이 산들을 넘어 오일장에 나를 데려가 봉숭아꽃이 그려진 고운 신발을 사주던 외할아버지가 계신 곳이었다. 장맛비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자 다음 장에 다시 사다 주마던 약속은 못 지키고 세상을 서둘러 떠나신 외할아버지. 그곳은 모두 공장이 들어서고 산소조차 온데간데없어졌다. 몸 갈 곳은 없지만 내 마음속의 외할머니 집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 속의 그곳, 삶의 활력소로 남아 있다.

어른들은 내가 자라기 전에 돌아가시고 어린 날의 나는 더 받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한다. 부모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부모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젊은 날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른이고 아이이고 이해받고 환대받는 시간과 장소는 필요하다. 그 장소는 그렇게 대접해주는 사람의 사랑으로 그득할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